신정록의 태평로
세월호 참사, 과도한 집단 自虐도 문제다
입력 : 2014.04.22 05:39 / 조설일보 / 신정록 논설위원
차라리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었다면 하늘 탓, 남 탓이라도 했을 것이다. 북한이나 국제 테러 집단에 의한 테러였다면 적(敵)이라도 뚜렷했을 것이다. 충격이 하도 크니 이런 망상(妄想)까지 하게 된다.
20년 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원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과속(過速)이 부른 부실(不實)'이었다. 그때 우리 사회는 30년 압축 경제성장과 압축 민주화의 뒤편에 도사린 악마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 후 20년이 또다시 불각(不覺)의 세월이었음을, 오히려 부실이 깊어지고 확대되어온 시간이었음을 이번에 확인하고 있다. 20년 전 사고들에서 한국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미국 언론, '후발 현대화의 한계와 취약성을 보여준 거울'이라는 중국 언론의 지적을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를 황망케 하는 것은 사고 후 벌어지고 있는 상식 이하의 황당한 언동들이다. 병실에서 젖은 지폐를 말린 선장은 차치하더라도 실종자 가족 앞에서 인증 샷을 찍으려 하거나 "장관 오셨다"며 예의를 갖춰달라고 말하는 공무원은 우리를 참담하게 한다. SNS 공간도 덜하지 않다. 일기장에나 적어야 할 개인적 경험과 주관적 판단이 객관을 가장해 판친다. 이번 일을 기화로 정부 때리기에 여념 없는 정치꾼도 많다. 이 모든 잘못을 떠안을 마녀(魔女) 찾기도 한창이다.
사고가 일어나기까지는 안전과 위기관리 능력의 문제이지만 그 이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우리 사회의 병증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아이들의 떼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모으지 못한다. 20년 전 사고 때는 적어도 이러지는 않았다. 만약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평균적 모습이라면 우리 사회엔 미래가 없다.
우리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이런 황망한 모습들에 각자 자신의 모습,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안의 부실은 없는가'라는 소극적 책임의식을 넘어 뭔가 께름칙한 점이 너무나 많은 게 사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런 선장과 공무원을 양산해내는 사회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니 집단 자학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이번 대참사는 어른들이 수백명의 아이들을 수장시킨 사건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러니 근본을 돌아보는 것은 어른들에게 맡겨진 절대적 과제다. 하지만 집단 자학은 그만했으면 한다. 충분히 해서가 아니다. 또 다른 세월호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놓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사회가 부실하기는 해도 전면적으로 자기 부정을 해야 할 만큼 형편없지는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단계별로 책임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여야 정치권도 이번 사건이 인재(人災)이자 관재(官災)라며 시스템 개혁에 나서겠다고 했다. 학자들은 이번에 고스란히 드러난 구조적 부실과 사회적 병리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재난 전문가들은 국가의 안전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점검과 개선, 법과 제도 정비를 주문하고 있다. 그대로 하면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20년 전에도 똑같은 얘기들이 나왔었다는 점이다. 지금 정말 중요한 것은 긴 호흡으로, 앞으로 20년간 계속한다는 각오로 제대로 하는 것이다. 과도한 자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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