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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도깨비-1 2013. 6. 12. 17:36

면암 최익현

1. 우리가 약해 억지로 개항을 하면 앞으로 저들이 하는 어떤 요구도 다 들어줘야 한다.

2. 우리 물화는 생명이 달린 것이고 유한하다. 무한한 사치품과 바꾸면 나라가 망한다.

3. 일본과 서양은 똑같다.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윤리가 무너질 것이다.

4. 일본인들이 재산과 부녀자를 약탈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5. 일본인은 탐욕스럽고 도리를 모르는 짐승 같다. 어찌 인간이 짐승과 교류를 하겠는가.

-최익현 '면암집'-

1876년 1월 최익현은 한양에 올라와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다.

도끼를 가져와 일본과의 조약을 격렬하게 반대한 최익현. 그는 누구일까?

최익현 선생의 생애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어렸을 때 타고난 자질이 있어 초명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여러 지방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 14세 때에는 성리학자인 화서학파 이항노의 문인이 되었다. 후에 최익현 선생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위정척사)

23세 명경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관직 생활에서도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선생은 서원철폐의 부당함을 알려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되었다. 호조참판이 된 최익현은 많은 부정부패와 폐단을 고치려다 기득권층의 반발로 도리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으려 하자 최익현은 도끼를 가져와 상소를 올렸다.

'일본과 절대로 강화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만일 맺으신다면 내 목 부터 먼저 치십시오'

이 일로 최익현 선생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 우리가 약해 억지로 개항을 하면 앞으로 저들이 하는 어떤 요구도 다 들어줘야 한다.

2. 우리 물화는 생명이 달린 것이고 유한하다. 무한한 사치품과 바꾸면 나라가 망한다.

3. 일본과 서양은 똑같다.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윤리가 무너질 것이다.

4. 일본인들이 재산과 부녀자를 약탈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5. 일본인은 탐욕스럽고 도리를 모르는 짐승 같다. 어찌 인간이 짐승과 교류를 하겠는가.

-최익현- '면암집'

선생의 상소는 비록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려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개항이 가져올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을사 5적들을 처단할 것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 올리는 등 말년에는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쓰시마섬으로 유배당한 최익현

74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키다.

선생은 1906년 3월 15일 집안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였다. 선생은 아무래도 문인으로서 이 국란을 타개할 수 없었는지 뜻이 맞는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항일의병운동을 준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서신을 보내 국난을 같이 대처하자라고 하였지만 답장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결국 제자인 고석진의 소개로 곧은 선비인 임병찬과 거사를 준비하였다. 선생과 일행은 호남으로 내려가 뜻이 맞는 선비들을 모으며 세력을 키웠다. 거기에 백성들과 의병들도 가세하여 세를 이루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선생은 의병들에게 이렇게 열변했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의병들은 이에 감동하여 뜻을 함께 하였다. 의병들의 수도 족히 수백을 이루어 선생은 일제의 죄목 16가지를 지적하는 규탄서를 일본에게 보내었다. 선생의 의병군은 정읍, 흥덕, 순창을 돌며 거점을 점령하였다. 순창을 점령했을 때 의병 수는 5백여명을 넘게 되었다. 의병군은 곡성을 넘어 남원을 치려했지만 남원방비가 너무 견고하여 순창으로 회군 하였다. 의병수는 8백명을 넘으면서 무시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6월 11일,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고종의 칙서를 전해왔다. 칙서는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여러 차례 뜻을 굽히지 않고 남원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군대가 일본군이 아닌 조선군임을 확인한 선생은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켜라' 명령하였다. 의병 해산령에 의병들은 탄식하며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14일, 선생 등 의병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일본 재판부는 선생에게 대마도 감금 3년을 선고하였다.

최익현 선생은 신발 밑에 우리 흙을 집어넣어 일본 땅은 절대로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선생은 일본이 주는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결국 1907년 1월 1일 선생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선생은 유교적 질서와 규범을 강조하는 성리학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지만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일의병운동을 한 의병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생은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만일 최익현과 같은 사람이 100명이 있었다면 조선은 충분히 독립하였을 것이다.' -어느 일본인이 남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