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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시일야방송대곡 이렇게 만들어졌다

도깨비-1 2013. 6. 12. 17:30

근대 최대의 필화사건을 불러 일으킨 < 시일야 방성대곡 > 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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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연의 " 시일야 방성대곡 " , 이렇게 만들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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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일야 방성대곡 > " , "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한다 " 는 뜻인데요 ,
1905년 11월 18일 , 일본과 우리나라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이 되자
이에 분노한 위암 장지연이 썼던 신문논설의 제목입니다 .
우리 민족의 울분과 분노를 잘 표현한 명논설로 평가받는 < 시일야 방성대곡>
그런데, 이 글이 신문에 실리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지연의 목숨을 건 각오 끝에 이 한편의 글은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장지연은 지금까지 모든 언론인들의 귀감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
바로 그 논설을 썼던 위암 장지연 ,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한편의 글이 우리 역사상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
또 이 명 논설을 썼던 위암 장지연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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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일야 방성대곡 > 이 실린 신문은 1905년 11월 20일자 " 황성신문 " ,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을
신랄한 어조로 비판한 < 시일야 방성대곡 > ,
신문 배달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일본경찰은 곧바로 대대적인 신문 회수 작업에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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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에 파견돼 있던 일본 경찰들이
본국에 국내사정을 보고한 <일본공사관>기록,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실린 신문이 배달된 11월 20일의 상황
이날 발행된 신문가운데 서울에 이미 배부가 된 800부는 회수했으며 ,
지방으로 보낼 2288부는 압수했다고 적고 있다 .

# 벽돌신문

당시는 일본에 의해 엄격한 신문검열이 실시되고 있었다.
검열에 걸린 부분의 기사 활자를 뒤짚어 인쇄를 한
이 벽돌신문은 당시 언론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


이런 현실속에서 일본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 시일야 방성대곡 >은
어떻게 신문에 실릴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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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러일 전쟁이후에는 일본이
미리 신문을 가지고 가서 허가를 받은 후에
문제있는 기사는 다 빼내 이런 기사는 도저히 들어갈 수 가 없다.
그러니까, 일본의 검열을 무시하고 강력한 편집을 해서 그대로 뿌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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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편집의 차이

편집방법도 독특했다. 같은 기사의 내용 안에서 강조할 부분의 글자크기를
크게 해서 편집하는 이런 방법은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보통 4호 활자로 기사를 쓰고 제목만 2호로 쓰는 경운데
이것은 거의 군데군데 2호로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파격적인, 당시에는 이런 편집 없었다.
장지연은 당시 국가가 처한 위기상황을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중요대목을 큰 활자로 인쇄하는 파격적인 편집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 황성신문의 발행부수는 3천부, 이것을 인쇄하는데는 어느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당시 시간당 7백통 정도를 인쇄할 수 있었다.
3천부 인쇄를 한다면 전후면 해서 7시간 정도는 돌아가야 인쇄가 가능했다 .
장지연은 자신이 쓴 < 시일야 방성대곡 >을 몰래 가지고 가서
밤새워 조판을 하고 인쇄를 했을 것이다. 장지연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것은 새벽 5시,
그러니까, 밤새 인쇄한 신문을 꼭두새벽에 이미 배부했다는 말이다.
검열하지 않고 냈다는 것은 사후에는 잡혀가겠다는 각오를 하고 냈다.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한편의 논설은 언론인으로서 장지연이 보여준 용기와 각오덕분에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 시일야 방성대곡 >은 이렇게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갖은 노력끝에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 시일야 방성대곡 > 은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장지연은 그렇게 일경의 눈을 피해 검열도 거치지 않고 배부를 했던 것일까요?
당시 논설이 실렸던 황성신문의 문체가 한글과 한문을 섞어쓰는 국한문 혼용체였기 때문에
이 논설도 국한문 혼용체로 씌여졌다.
앞부분에서는 지난날 이등방문이 이 조약체결을 위해 조선에 왔을 때
그것도 모르고 온 국민이 열렬히 환영한 것에 대해 통탄해하고 있다 .

그리고 중간부분에는 ,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정부대신이란 자는 자기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어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어
4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년 사직을 바치고 2천만 생명을 남의 노예노릇을 하게 했다"

을사보호조약에 서명을 했던 정부대신들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장지연은 그들을 "개돼지보다 못할 뿐" 만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

또 마지막 부분에 보면 "아, 원통하고 분하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이래 4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루밤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글만 읽어도 장지연이 이 사태에 직면해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또 을사조약이란 것이 " 4천년의 국민정신을 하룻밤에 망하게 하는"
얼마나 큰 민족적 위기인지가 느껴진다. 장지연은 이렇게 울분과 분노를 토로하면서
은연중 민중들에게 깨어 일어날 것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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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종무 관장이었던 민영환은 < 시일야 방성대곡 > 을 읽고 감동을 해
"나라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민영환에 이어 이상철, 이설등 우국지사들의 자결도 계속 이어졌다.
곳곳에서 의병들도 일어섰다. 일제의 강제적인 조약체결을 최초로 강력하게 비판했던
장지연의 < 시일야 방성대곡 > 은 조약체결 이후 불꽃처럼 이어진 구국운동의
심지를 당긴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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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의병들에 실지로 가담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구국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논설이 됐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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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문이 발간된 후 장지연은 곧 구속되고 신문은 압수를 당한다 .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 시일야 방성대곡 >은 어떻게 퍼져나갔던 것일까?
대한매일신보 사장이었던 영국인 베델의 묘지,
베델의 비석 뒷면에는 이상한 흔적이 있다. 누군가가 비문의 내용을 깍아낸 것이다.


일제가 내용을 문제삼아 깍아낸 비문을 쓴 이는 바로 장지연이다.
베델이 죽자 비문을 지어줄 정도로 각별했던 장지연과 베델 ,
두 사람이 이런 관계가 된 데는 < 시일야 방성대곡 > 의 영향이 컸다 .

사장이 영국인이라 일본의 검열을 받지 않았던 < 대한매일신보 > 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바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11월 18일자. 대한매일에서도 이 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이 사실을 보도한 것은 < 잡보 > 난,
지금으로 치면 기사난에 소식을 실었다. 즉, 이 사건을 단순한 기사로 취급한 것이다.
이에 비해 황성신문은 논설난에 < 시일야 방성대곡 > 을 싣고 있다 .
당시 신문에서 논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금과는 달랐다.
당시 논설의 역할은 굉장히 컸다. 지금은 논리적으로 써 가지고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경향이라면 당시에는 큰데서 호령하고 가르치듯이 논설을 썼다.
논설의 비중도 컸고, 미치는 영향도 일반 기사에 비해서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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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조약 청체전말

< 시일야 방성대곡 > 바로 아래에 < 오건조약 청체전말 > 이라는 기사도 싣고 있다.
" 다섯 가지 조약이 체결된 전말 " 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약체결과정을
적고 있는 보도기사다.

< 시일야 방성대곡> 과 <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합하면
기사의 양만 해도 당일 신문 전면을 대부분 차지한다 .
위에다가 논설을 통해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싣고
두번째로 오건조약 청체전말에는 조항내용이 5가지를 다 나열하고 거기에 문제점,
이등방문이 어떠한 강압을 통해 체결했는가가 같이 있기 때문에
분리하면 힘이 약하죠. < 시일야 >와 < 청체전말 >은 같이 항일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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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신문 >이 < 시일야 방성대곡 >을 싣고난 후 대한매일신보의 보도 태도도 달라진다.
11월 21일 , 1면 머릿기사인 논설난에 < 황성의무 >를 싣고 있다.
< 시일야 방성대곡 >을 개제한 황성신문은 언론 본연의 의무를 다했다며 그 용기를 극찬했다.
이어 대한 매일신보는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한다.
호외의 한면에는 한문으로 번역한 < 시일야 방성대곡 >을 뒷면에는 영어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을 전재했다.


신문 상단에는 < 시일야 방성대곡 >이 황성신문 정간의 원인이 된 기사라는 것을 밝히고 ,
< 시일야 방성대곡 >의 전문을 영어로 번역해 싣고 있다
이렇게 데일리뉴스에 번역돼 실리면서 < 시일야 방성대곡 >은 해외로까지 알려지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영국인 신문 < 재팬 위클리 크로니클 >,
이 신문은 12월 21일, < 대한매일신보 > 의 기사를 받아 장지연의 < 시일야방성대곡 >을 기사화한다.
이로써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세계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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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지연의 논설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수많은 구국운동에 불을 당긴
직접적 요인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체결될 당시
아직 일반 백성들이 이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인지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글로써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언론인 본연의 자세를 보였던 것입니다.
장지연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은 그렇게 세계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민족적 울분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명 논설을 썼던 위암 장지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 이건 위암 장지연의 수많은 유품가운데 하난데요,
그중에서도 장지연이 가장 아끼고 평생 가까이 두었던 물건이라고 합니다 .
이게 뭐길래 장지연은 평생 옆에 이것을 끼고 다녔던 것일까?


이거는 술병이다. 지금으로 치면 휴대용 술병인 셈,
장지연은 심지어 술병을 목에 걸고 다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평생 술을 가까이했다 .
애주하시는 수준이었는데, 조약이후 과음을 하기 시작 했다.


< 시일야 방성대곡 > 으로 인한 필화사건,
그 이후 더욱 암울해진 시대상황이 그로 하여금 술을 그렇게 가까이 하게 했다.

# 유물
그의 유품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장지연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히는 <만국사물기원역사>는
동서양 사물의 기원에 대해 밝힌 일종의 백과사전.
이외에도 장지연은 평생 100여권의 책을 직접 저술했다 .
뿐만 아니라 장지연은 교과서 편찬에도 관여한다 .
생리 위생학에 대한 책도 저술했다.
필화 사건 이후 잠시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몸담았던 당시에
직접 교과서 편찬에 관여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화학 교과서 같은 경우는
설명뿐만 아니라 실험과정을 직접 그림으로
그릴 정도로 상세히 만든 것이다.


# 지도
뿐만 아니라 역사지도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역사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많았던 장지연은
대동여지도를 직접 배껴서 그 위에 지역의 역사와 연원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붙힌 역사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 교지
이 한 장의 과거 합격교지는 장지연의 사상적 기반이 유학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누구에게 유학을 배웠던 것일까?
장석봉 고가. 이 집은 위암 장지연 선생께서 12살에 들어오셔서 7,8년간 공부하던 곳,.
장지연은 10살 때 어머니를 잃고, 그 후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잃게되자
직접 먼 친척뻘인 장석봉을 찾아와 학문 배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 장석봉 교지
천안군수와 전주판관까지 지내고 낙향했던 장석봉은 당시 고향에서 후배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장지연은 이곳에서 장석봉의 손자 장익상과 함께 유교적 학문의 뿌리를 닦는다.
이곳에서 5년여 동안 유학의 기반을 닦았던 장지연은 19세가 되던 해 , 스승 장석봉이
세상을 뜨자 그도 이곳을 떠난다.
이곳을 떠날 무렵 , 그는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과거에 응시를 하면 번번이 낙방, 4번의 실패 끝에 겨우 합격교지를 받게 된다 .
하지만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터라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
여러 장의 상소를 대필하기도 한다.

과거에 합격하기 전인 20대에 그가 안효제의 청을 받아 대필했던 한 장의 상소,
1884년 , 개화파들의 의제개혁 주장에 맞서 수구파의 입장에서 올린 이 반대
상소문을 보면 장지연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상소 내용 : 미국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개화파들이
소매가 넓은 관복을 폐지하고 활동하기에 편리한 소매가 좁은 옷을 입자고
주장하자 옷은 그 나타난 문양으로 귀천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의제소에서 보면 옷소매라든지 네모난 깃 전통적인 풍속은 사소한 것이라고
바꿔서는 안된다는 보수적인 입장의 상소.

이 상소문을 올릴 이십대까지만 해도 장지연은 보수적인 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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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과거에 다섯 번이나 응시할 정도로
오직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었던 보수적인 유학자 장지연,
이런 보수적인 모습과 서구문명의 산물인 이 신문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요, 이런 보수적인 유학자였던 장지연이 어떻게 언론인으로
변해갔던 것일까요?

< 사우록 >
장지연이 자필로 자신의 스승들과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있는 글인데,
벗이라고 쓴 부분에 박은식, 또 남궁억, 유근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황성신문을 비롯한 각종의 신문에 주필로 참여를 했던 언론인들인데,
이들 역시 처음에는 다 한학을 공부했던 유학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신문들이 만들어지면서 신문역사가 막 개화하던 당시,
지식인들이 신문의 효용성에 눈을 뜨고 언론인으로 변해간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변화이다.

그렇다면 당시 일반 사람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그림에 한 사람이 신문을 들고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서 곰방대까지 문 편안한 자세로
읽어주는 신문을 듣고 있는데요,
이것은 당시 종람소의 풍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문 구독료가 꽤 비쌌고 발행부수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때문에 드물게 종람소라는 곳에서
일종의 간이신문열람소 같은 곳이어서 가면 비치된 신문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당시는 하루가 다르게 개화문물들이 들어오고 세상이 급변하던 때인 만큼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궁금했고
그 소식을 알기 위해서 이렇게 종람소를 찾아가서 같이 신문을 읽곤 했던 것이다.
신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날로 커져가던 바로 이 시기에
장지연도 본격적인 언론인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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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급제하고 잠시 관직에 근무하던 장지연은 1898년 사직하고
이듬해인 1899년 본격적인 언론인으로 첫 발을 딛게 된다.
1899년에 창간된 격일제 신문인 < 시사총보 >, 이 신문의 4면,
신문 관계자들의 이름을 명기한 곳을 보면
장지연이 편집인으로 이 신문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의 창간호부터 관여했던 장지연은
직접 쓴 < 시사총보 > 발간취지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언론의 역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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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총보 > 가 창간되던 무렵을 전후해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막 시작되고 있었다.
격일제 신문에서 일간지, 국한문 혼용체부터 한글전용신문까지
다양한 형태의 신문들이 활발하게 창간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신문창간이나 집필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당대 앞선 지식인들로 서재필을 비롯한 박은식 , 신채호 , 남궁억등
우리 근대사의 주인공들이기도 한 이들의 활약으로
신문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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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 독립신문 창간, 98년 일간지가 여러 개 나와.
배재학당의 매일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시사총보
정치적으로는 독립협회 활동.....신문에 나오는 기사가
집회에 이슈를 제공하고, 그것이 주장이 돼서
정부에 건의를 하고 역동적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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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 < 시사총보 > 에서 6 개월여
활동을 하던 장지연은 다시 황성신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황성신문으로 옮긴 장지연은 1904년 신문사의 사장으로 선출된다.
그렇지만 당시 신문 경영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신문사의 재정은 주로 광고료와 구독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고가 그리 많지 않았던 만큼 구독료의 의존 비율이 더 높았다.
하지만 신문구독자들이 구독료를 제대로 내지 않아
신문재정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경영난으로 몇 차례 휴간과 복간을 반복하던 황성신문은
심지어 신문 구독료 납부를 기사화하기도 한다.
신문사의 재정상태를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구독료 미수금을 납부하라는
구독료 독촉기사를 신문에 실은 것이다.
그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장지연은 논객으로서의 기질을 유감 없이
발휘한 또 한편의 명 논설을 쓴다.

" 신문의 역할이 눈과 귀와 같이 소중한 것인데
경영난으로 인해 이제는 붓을 땅에 던지고
신문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내용 " 의 논설이었다.

이 논설이 나가자 전국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고종은 전국 관아에 신문구독료 납부를 독려하는 동시에
직접 황성신문사 건물을 하사하기도 한다.

그렇게 옮긴 새 사옥에서 장지연은 또 한번의 붓을 휘둘러
< 시일야 방성대곡 > 을 쓰게 된다.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 또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던 이 때가
언론인 장지연으로서는 가장 황금기였습니다.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씌여진 것도 바로 이 때다.

그런데 장지연이 < 시일야 방성대곡 >으로 비판했던 " 을사보호조약 " ,
이 조약은 10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조약이다.
그 날의 진실이 과연 무엇이냐, 체결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국제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에 대해서는 비단 우리나라 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법학자들까지 연구를 하곤 한다.

이것은 < 시일야 방성대곡 > 바로 아래 씌어진 < 오건조약 청체전말 > 이란 기사인데,
< 시일야 방성대곡 > 이 다소 감정적이라면 이 글은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오건 조약, 즉 다섯가지 항목의 조약이 어떻게 체결이 됐는지,
체결과정에 대해 적고 있는 보도기사이다.


< 시일야 방성대곡 > 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그 날의 진실을 알리는데는 더 중요한 기사이다.
이 기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을사조약이
왜 양국 사이에 그렇게 오랫동안 논란이 됐는지,
또 왜 이 조약이 무효인지를 알 수가 있다.
장지연의 기록을 따라서 그 날의 진실로 한번 접근해 보자.

문제가 되고 있는 을사조약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

이것은 을사조약 한국 측에서 작성한 원본이구요, 이것은 일본측 겁니다 .

- 조약 원본

모두 다섯 가지 조항으로 돼 있는 소위 을사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을 비롯해 일본 천황을 대표하는 통감이
국내에 주둔하면서 정치, 외교, 재정등 모든 부분에 걸쳐 심리를 담당하겠다는 것,
심지어 일본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대한제국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조항까지 들어있다.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위한 전 단계인 보호국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말이 조약이지, 실질적으로는 조약에 필요한 형식이나 절차를 갖추지 않은
일본의 일방적인 문서다 .

대한제국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내용의 이 조약은
체결 문서만을 놓고 보더라도 문제가 많다.

- 조약, 한일협약과 비교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조약의 제목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소위" 을사보호조약 " 이라는 이름은 뒤에 일본이 임의로 붙힌 것이다.

일본인들이 언젠가는 자기들이 제목을 써넣겠다고 생각하고
조작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봉인
문서의 봉인에도 문제가 있다. 보통 국제적인 조약의 경우
조약이 성립된 즉시 함부로 문서를 조작할 수 없도록 봉인을 단단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을사조약의 경우 봉인을 그냥 끈으로 묶어두어 언제든지 풀 수 있도록
해 두었다.

- 서명
문서의 서명 난을 보면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 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다. 조약에서 왕을 대신해 정부대신이 서명할때는 반드시 왕의 위임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양국다 왕의 위임장없이 정부대신들이 조인을 했다.


체결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에 당시 고종이 머물고
있었다. 이토우 히로부미는 조약에 협조하라는 천황의 친서를 들고 서울에 왔다. 시일야
방송대곡에선 "지난번 이등박문이 한국에 왔을 적에 어리석은 우리백성들은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가 더할 수 없이 환영하였다", "일본 병사가 다수 입궐하여 황제 지척에
겹겹이 둘러싸고 총칼이 숲을 이루었는데 내정부와 궁중에도 일본병사가 숲을 이루어 중명전
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마침 폐하께서 인후에 고통하옵심으로 이등박문의 알현을
거절하사 가로되, 볼 필요 없다. 나가서 정부대신과 협의하라", "외부대신 박제순은 반대를
하면서도 자구를 조금 고치면 인준하겠다고 하여 조약이 체결됐다"라고 적고 있다.

고종황제가 9개국 원수에게 보낸 친서
고종은 을사조약에 왜 부당한지 이유를 들어 하나하나 밝히고 있다.
(1) 협박 감금 상태에서 조인되었다.
(2) 내각에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다.
(3) 대신회의는 일본이 소집한 것으로 불법이다.
(4) 정식절차를 밝지 않고 강제에 의해 체결되었으므로 늑약이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1906년 12월 1일 영국의 트리뷴지는 게재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법학자 프란시스레이는 1906년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란 논문에서 서명
이 행하여진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우리는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1963년 국제법위원회에서는 위협강요에 의한 동의는 법적으로 무효이다.라고 적으면서
예로 들은 것이 1905년의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강제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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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천만 조선인들에게 던진 구국의 불꽃, 시일야방성대곡 **

1. 주요내용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의 피끓는 분통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시일야 방성대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한 <시일야 방성대곡>
근대 비판언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시일야 방성대곡>은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1면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일본의 검열이 엄격했던 그 당시,
황성신문은 어떻게 <시일야 방성대곡>을 실을 수 있었을까?

언관, 해야할 말은 목숨을 걸고라도 한다.
그 유교적 정신에 입각한 장지연의 기개와 용기가 2천만 동포들 가슴에
구국의 불꽃을 던진 <시일야 방성대곡>을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위암 장지연 최고의 논설인 <시일야 방성대곡>을 만나보고
이 논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근대 비판언론의 귀감이 되는
이유를 알아본다.


2. 세부내용

1) 1905년 11월 20일, 시일야 방성대곡이 나오다.

1905년 11월 20일
을사조약의 부당함에 울분을 토하는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는 일본이 정한 조례에 따라 신문 검열이 엄격하게 실시되던 시기,
이러한 시기에 <시일야 방성대곡>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신문을 찍기 위해 만든 활판을 먼저 검열받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지만
<시일야 방성대곡>이 실린 황성신문은 검열을 받지 않고
바로 인쇄에 들어갔던 것이다.
검열을 거치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만큼이나 주의를 끄는 것이 있다.
활자체를 달리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편집,
이것은 <시일야 방성대곡>의 메시지를 보다 강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이 한편의 논설로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시일야 방성대곡>은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 황성신문의 장지연, 그는 누구인가?

19세기 말, 어지러운 정국을 매섭게 비판해오던 황성신문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위해 1면을 열어준다.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배포된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시일야 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검열이 엄격했던 당시 이는 미리 예측했던 바이다.

그러나 장지연이 택한 방법은 정면 돌파.
무엇 때문에 그는 정면 돌파를 택했던 것일까?

언론인이기 전 장지연은 과거를 5번이나 치른 유학자였다.
할말은 목숨을 걸고라고 한다는 언관. 장지연은 그 유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필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황제와 대신들에 대한 강제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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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장지연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글은 1905년 11월 일본의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애국적 논설이다.

이 글의 첫단락은 이토 후작에 대한 민중들의 잘못된 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일본을 독립의 후원세력으로 '순진하게' 믿음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가능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자책이 담겨 있다. 나아가 이 자책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기도 하다.

두 번째 단락은 임금의 강경한 성의(聖意)와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이토 스스로도 족히 알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원천적으로 조약의 의미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다.

세 번째 단락은 조국을 팔어넘긴 매국 5적을 통렬하게 꾸짖고 있다. 비분강개한 마음이 거칠 데 없이 드러나 있으며, '개돼지만도 못하다.'는 직설적인 표현 속에 신문 사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장중함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감정에 충실하게 분토를 표출하고 있다.

끝으로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이천 만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마지막의 '동포여! 동포여!'라는 거친 목소리 속에 담긴 안타까움과 분노는 오래도록 당시의 독자들인 이천만 민중과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의 귓전에까지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오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분노 속에서, 그리고 눈을 번연히 뜨고 조국의 종묘사직을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넘겨 주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움이 격렬한 문체와 잘 조응되는 가운데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열정이 조국의 정기를 이어오고 있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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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선생은 근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며 우국지사이시다.

선생은 고종 원년(1864)에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호(號)는 위암(韋庵)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고종 31년(1894)에 식년진사시 (式年進士試)에 입격(入格)하여 진사가 되었고, 후에 내부주사 (內部主事)를 역임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항일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었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898년 내부 주사의 관직을 버리고 남궁억, 유근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이상재, 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써서 일제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려 의분심(義憤心)을 갖게하였고, 서울 장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투옥 되었고, 이듬해 1월 출옥한 후 그 후 1906년 대한자강회 (大韓自强會)를 발기(發起)하고, 동년(同年)에 휘문의숙장 (徽文義塾長)을 역임, 1908년 해참위 (海參威 블라디보스톡)로 망명(亡命), 그 곳에서 발행되는 해조신문 (海朝新聞)의 주필로 활약하다가 익년에 귀국하여 진주(晋州)에서 경남일보 (慶南日報)를 발간하여 주필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실의에 빠져 시부(詩賦)와 음주(飮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1921년 10월 2일 58세를 일기로 마산에서 타계(他界)하였다.


= 을사조약의 내용

일제는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1월 9일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한 뒤,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조약의 내용에서

첫째,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와 그 사무를 통리 지휘하고

둘째,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가와도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못하게 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탈취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통감 1인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고 하였는데, 그 조약상의 문면에 따르면 "전혀 외교상에 관한 사항을……"이라고 하였으나 한국의 모든 내정을 관장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인 지위는 말살되다시피 하였다. 이를 을사늑약(乙巳勒約) 이라고도 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함이 가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 밑에 한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 폐하에게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짐.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영을 유지함을 보증함.

= 을사조약 조인에 대한 고종의 태도

"이와 같이 중요한 조약을 그와 같이 용이하게 급격히 체결을 보게 된 것은 천재(千載)의 유한(遺限)이라… 대신 등의 무능·무기력은 마음으로부터 견딜 수 없다.…각 대신은 일본과 동복(同腹)이 되어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하였으니 짐의 적자는 일제히 일어나 이 슬픔을 함께 하라."
{日本公使館紀錄} 1905년, 乙巳條約)

고종은 이 조약의 체결이 고종의 의사와 관계 없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임을 내세우고 국민들이 이에 이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기로 하였으며, 비밀리에 미국에 있는 헐버트에게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미국 정부에 전달할 것을 부탁하기로 하였고, 1907년에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 국제법학계의 의견

국제법학계 일부에서도 을사륵약이 불법임을 지적한 의견이 있었다.

"그런데 극동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 11월 조약은 일본과 같은 문명국이 도덕적으로 비열한 방법과 물리적인 강박에 의하여 한국정부에 강요되어 체결되었다. 조약의 서명은 이토 후작과 하야시 공사가 일본군대의 호위를 받는 압력 아래서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로부터 얻었을 뿐이다. 이를 통한 저항한 후, 대신회의는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하였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 특히 워싱톤에 대표로 보내서 가해진 강박에 대하여 맹렬히 이의를 제기하였다. 서명이 행해진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우리는 1905년의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하여 행사하는 강제와는 달리, 전권대사의 인격에 대하여 행사된 강박을, 조약을 무효로 하는 동의의 하자에 해당한다는 사법(私法)상의 원리가 공법에 적용된다는 것은 실제 인정된다." (프란시스 레이, {국제공법} Ⅷ, (1906)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 )

= 민영환이 국민에게 남긴 유서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민족의 통분은 크게 넘쳐 흘렀고 여러 가지 형태로 민족적인 저항이 전개되었다. 조약의 강제 체결을 처음으로 전국에 알린 것은 황성신문이었다. 특히 11월 20일에는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여 거족적인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검열에서 삭제당할 것을 우려하여 장지연은 검열을 무시하고 신문에 게재하였다. 결국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하였다. 언론기관의 반대운동과 함께 여러 형태의 민족적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천명의 군중이 경운궁 앞에 와서 조약의 반대와 무효를 주장했으며 종로상인들은 철시투쟁을 벌였다. 또한 민인들의 분노에 힘입어 전현직 관료와 양반유생들의 상소와 자결 투쟁이 이어졌다. 특히 민영환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항일 운동을 격화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순국하기 전 5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국민에게 남긴 유서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어 많은 국민에게 읽혀졌고, 국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북돋우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오호라! 국치 민욕이 이에 이르니 우리 인민은 장차 경쟁에서 진멸될 것이로다. 무릇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음을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으리니 여러분 이를 양해하라.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니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음이라.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조력하겠으니 우리동포 형제는 천만 번 더욱 분투하여 뜻을 굳게 하고 학문을 익히며 힘을 합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을 다시 찾으면 죽은 자는 황천에서도 기꺼워 하리라. 오호라! 실망하지 않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삼가 이별을 고하노라." (大韓每日申報 1905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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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 방성대곡>

1905년 겨울, 장지연은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와 이등방문을 규탄하며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에서 나라 잃은 원통함을 절규하며 읇었다. 그는 친일파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개돼지만도 못한,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고,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고 했다. 그럼 송병준은 누구인가? 송병준은 이완용보다 앞서 일진회라는 친일조직을 결성해 을사조약 체결을 빨리 할 것을 종용했다.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고 미친 주장을 했다.


나라를 팔아먹고 얻은 권력으로 송병준은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민영환의 땅을 강탈했다. (한겨레 2003.12.25일 참조) 그 땅이 바로 현재의 부평미군기지인 것이다. 이를 보고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12월 23일 논설에서 민영환의 문하에서 식객이었던 송병준에 대해 “주인을 무는 개이며, 민충정공의 가산을 도둑질하니 참담하다.”라고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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