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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칼럼] 윤창중씨가 정말 후회해야 할 장면

도깨비-1 2013. 5. 14. 23:51

[김창균 칼럼] 윤창중씨가 정말 후회해야 할 장면

11일 회견서 잘못 인정했다면 추잡한 진실 공방 멈췄을 것
홍보수석에 책임 떠넘긴 것은 청와대를 敵으로 돌린 얕은 꾀
'인턴 무능력했다' 장황한 설명, 弱者 두 번 짓밟는 야비함 드러내

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입력 : 2013.05.14 23:19 /조선일보

 

윤창중씨가 귀국 이틀 후인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을 때 짧은 사과 성명을 예상했다.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술을 마시고 터무니없는 잘못을 했다. 피해 여학생에게 깊이 사죄 드린다. 대통령과 국민께 송구스럽다." 그런다고 해서 그의 허물을 되돌릴 수야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후 상황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윤씨가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면 그가 7일 밤 접촉했다는 인턴 여학생의 신체 부분이 허리였는지 엉덩이였는지, 8일 새벽 여학생이 윤씨 호텔 방문을 열었을 때 윤씨가 속옷을 입고 있었는지 알몸이었는지, 또는 가운을 걸쳤지만 노팬티였는지 같은 추잡한 디테일에 대해 언론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윤씨 가족이 하루하루 TV와 신문에서 '끔찍한' 헤드라인을 접하며 겪고 있을 정신적 충격도 한결 덜했을 것이다.

윤씨는 "미국에 남아서 무죄(無罪)를 입증하려 했지만 이남기 홍보수석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경찰 수사가 시작된 상황에서 범죄 인정으로 비칠 수 있는 도피 행위를 합리화한 것이다. 그러나 윤씨가 청와대를 물고 들어간 물귀신 작전은 청와대로 하여금 며칠 전까지 동료였던 윤씨에 대한 최소한의 마음의 부담을 덜게 해 주었다. 청와대는 윤씨에 대한 극도의 배신감 속에 윤씨의 성추행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는 양상이다. 그래서 당초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윤씨의 미국 송환이 점차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다가오고 있다. 윤씨의 얕은 꾀가 스스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날 회견 중 윤씨가 가장 신경 써서 준비한 대목은 피해 여학생과의 신체적 접촉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윤씨는 "30분 동안 호텔 바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나오면서 여자 가이드의 허리를 툭 한 차례 치면서, 툭 한 차례 치면서 '앞으로 잘해. 미국에서 열심히 살고 성공해' 이렇게 말하고 나온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윤씨는 "툭 한 차례 치면서" 부분을 마치 연극 배우가 관객에게 극(劇)의 테마를 주입시키듯 아주 느린 템포로 두 차례 반복했다. 신체 접촉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힘든 만큼 그 순간의 의미를 가능한 한 축소해서 전달하려는 고민 끝에 고안해낸 퍼포먼스인 듯했다.

윤씨가 잘못을 빌었다면 윤씨의 이번 행동은 그가 처음 저지른 실수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결국 윤씨는 자신이 업무상 알게 된 지 하루 이틀밖에 안 된 어린 여성의 엉덩이 혹은 허리 부분에 손을 대며 격려하는 일쯤은 과거에도 수없이 해왔고 이번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을 계속 되풀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백한 셈이다. "허리를 툭 한 차례 치면서"라는 윤씨의 대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탁자를 턱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조사 발표 내용과 짝을 이루며 오랜 세월 사람들 입에서 회자될 듯싶다.

윤씨는 기자회견 처음 5분가량을 피해 여학생이 업무에 서툴렀으며 그래서 자신이 여러 차례 꾸짖었다는 배경 설명에 할애했다. 윤씨가 사건 하루 전인 7일 아침 식사 때 동석한 기자들에게 피해 여학생을 "나라의 재목이 될 인재"라고 치켜세웠던 것과는 정반대 평가다. 인턴 여학생의 업무 능력이 뛰어났는지 형편없었는지는 성추행 성립 여부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씨가 이 부분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인턴이 윤씨의 질책에 앙심을 품고 윤씨에게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를 덮어씌웠을지 모른다는 추론으로 몰고 가려는 계산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윤씨는 그렇게 해서 국민 판단을 흐릴 수 있다고 착각했겠지만, 국민은 윤씨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이미 큰 상처를 입혔던 약자의 인격을 다시 한 번 짓밟을 수 있는 야비한 품성(品性)의 소유자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윤창중씨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무거운 대가를 치렀던 지인(知人)이 있다. 그 일이 있은 지 수 년이 지난 뒤 만났을 때 "그때 일로 아직도 힘드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그때 그 순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려 일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을 수만 번, 아니 수십만 번쯤 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윤씨도 지난 7일 밤 그리고 8일 새벽 있었다는 '문제의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수백 번쯤 되돌려 봤을 것이다. 그러나 윤씨가 그에 못지않게 후회해야 할 것은 11일 낮 서울 기자회견 장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