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만물상] 빙판길

도깨비-1 2013. 1. 5. 09:58


[만물상] 빙판길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 2013. 01. 05

 

▶ 눈만 내리면 꼬마들이 비탈진 골목으로 몰려나와 길바닥을 반질반질 다졌다. 몇 걸음 힘차게 달린 뒤 눈 다진 빙판 위로 내질러 미끄럼을 탔다. 길게는 십몇 m를 지쳤다.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변변한 스케이트장 하나 없던 시절 꼬마들에겐 으뜸가는 겨울 운동이었다. 나중에 동상에 갈라 터진 손발을 담뱃가루 푼 물에 담글지언정 그보다 신나는 놀이가 없었다.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얼음판을 더 매끈하게 다듬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칠색 팔색하며 아이들을 말렸다. 연탄재를 들고 와 빙판에 으깨 뭉갰다. 그런 어른을 붙잡고 제발 그냥 둬달라고 애걸하던 아이도 이젠 어른이다. 그들이 초로(初老)가 돼 빙판길에 넘어질까 엉금엉금 종종걸음을 옮긴다. 그땐 아예 외출을 삼가는 노인도 많았다. 어머니들은 물동이 이고 우물터까지 빙판길을 오가야 했다. 해진 고무신에 새끼줄을 감긴 했어도 아슬아슬하긴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을 냉동고에 밀어 넣은 듯 강추위가 기승이다. 어느 길이든 말 그대로 빙판이다. 주변엔 누가 넘어졌느니 다쳤느니, 낙상(落傷) 환자 얘기가 널렸다. 119 안전신고센터도 올겨울부터 빙판 낙상사고 통계를 잡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만 지난달 3000건이 신고됐다. 아침 7~9시 출근길이 특히 위험하다. 12월 14일엔 하루 200건이 접수됐다. 구급차가 부족해 행정차까지 동원됐다. 출근시간을 넘기면 이번엔 노인들이 낙상 골절을 당한다.
▶차는 빙판길에서 열 배 더 위험하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가 갑자기 추워지면 전날 눈 녹은 물기가 다시 얼어 얇은 얼음막을 이룬다. 도로를 코팅한 것처럼 검은 아스팔트가 투명하게 비쳐 '블랙 아이스'라고 부른다. 이런 길은 마른 도로보다 제동 거리가 58%나 길어진다. 염화칼슘을 뿌려 젖었던 도로도 위험하다. 다리와 고가도로, 고층빌딩 응달진 곳에 사고가 많다. 빙판 사고 현장에 내 차를 멈추고 도와주려다 뒤따라오던 차가 덮칠 수도 있다.
▶가수 송대관은 "인생사, 세상사 모두 쿵쿵따리 네 박자"라고 했지만, 그가 틀렸다. 인생은 빙판길이다. 살금살금 걷지 않으면 언제 꽈당할지 모른다. 겨울 강추위가 그걸 새삼 일깨워준다. 가게나 집 앞 빙판을 깨고 말려놓으면 그게 그렇게 고맙다. 이때쯤 스웨덴은 중앙·지방 정부가 눈 치우고 빙판 없애는 비상팀을 가동한다. 천문학적 숫자로 예산이 붙어야만 복지가 아니다. 우리는 북구에서 돈 쓰는 복지만 배워 왔을까. 빙판길 녹이는, 마음 쓰는 복지는 못 배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