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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갑식의 세상읽기] 아파도 울지 못하니까 중년이다

도깨비-1 2012. 12. 18. 09:44
[문갑식의 세상읽기] 아파도 울지 못하니까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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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다음] 칼럼 
글쓴이 : 조선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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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식 (62)은 정신과 명의(名醫)다. 그가 그 좋다는 연세대 의대 교수직을 던질 때 모두 놀랐다. "정말이야?"라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정말 떠났다. 정년을 4년 앞두고서였다. 사나이의 선택엔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는 인간의 삶을 이렇게 구분했다. 육십까지는 전·후반전, 이후는 연장전이다. 남은 생(生)을 그는 타율 아닌 자율적으로 살고 싶었다. '의대 교수'라는 허명(虛名)에 각종 성인병이 생긴 것은 둘째 문제였다.

↑ [조선일보]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조선일보]문갑식 선임기자

 

황혼기에 번듯한 직장을 내던지는 것은 웬만해선 선뜻 결심하기 힘들다. 나는 그 점을 끈덕지게 파고들었다. 그가 말했다. "흰 종이에 '나가야 할 이유'와 '남아야 할 이유'를 적어봤어요. 전자(前者)가 월등히 많았습니다."

의사들은 매뉴얼대로 환자를 치료한다. 정신과에선 환자와 감정이입을 피한다. 그도 그렇게 살았다. 연륜이 쌓이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환자에게 연민을 가져야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겠죠?"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수익(收益)에 얽매이는 현행 의료 체계가 그걸 가로막았다. "돌이켜보면 저도 관리자였을 때 똑같았어요. 후배에게 냉정하고 엄격하게 굴었고. 개인주의와 성과주의에 저도 모르게 얽매인 거죠."

그가 결심을 굳히게 된 두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65세에 퇴직해 95세 때 자기 일기를 공개한 어느 노인의 고백이다. 노인은 후회했다고 한다. "'덤'인 줄 알고 이렇게 살았는데 지나보니 어리석었다…." 인생은 결코 덤일 수 없다. 또 하나는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이다. 티베트 여인이 최고의 클라이머로 분(扮)한 브래드 피트에게 말했다. "당신이 사는 서양에서는 가장 높이 올라가는 사람을 존경하지요? 여기서는 제일 많이 버리는 사람을 존경해요."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이해 못 할 행로(行路)를 택한 사연은 여기까지다. 그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연구실에선 보이지 않던 우리 중년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청년들처럼 '아프다'고 절규도 못 해본다.

승진에서 처진 A부장은 사무실에서 할 일이 없다. 그런 고문이 없지만 돈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같은 헬스클럽에 다니다 돌연사한 B전무도 사연이 있었다. 돈을 빼돌린 부하 직원 때문에 홀로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제약회사 C팀장은 뺀들대는 후배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 상사에게 말하면 "후배도 다스리지 못하느냐"는 핀잔이 날아든다. 그 모습을 보고 후배는 킬킬댄다. '억울하다' '차라리 내가 나가버려?', 이런 생각이 꿈틀댄다.

이런 이들은 평생 회사와 가족을 위해 살았다. 제 몸 위해 양복 한 벌 사 입는 걸 두려워했다. 울고 싶어도 마음 편히 소리 내 울어보지도 못했다. 사표를 써놓고도 참고 또 참았다. 그런다고 자식이나 아내에게 존경도 받지 못했다.

몸과 마음에는 훈장처럼 성인병이 주렁주렁 달렸다. 못하면 도태되고, 병이 생기면 자기 책임인 사회이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해본다. 지금도 불안한데 퇴직 후 30년을 돈 걱정 해야 하는 처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홍식은 한국자살예방협회 초대 회장이다. 2003년쯤의 일이었는데 그해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그 뒤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자리를 놓지 않고 있으며 점점 2위와 격차를 벌려가고 있다.

분석은 다양했다. 어느 철학자는 그걸 '피로(疲勞) 사회'라 불렀다. 압축 성장과 신자유주의가 중년의 삶에 우울과 불안을 심어놓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울증 환자들이 서성이는 저물어가는 공화국인가?

이홍식은 증세와 병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100명이 있다면 완전히 건강한 사람과 완전한 병자는 대략 각각 15명쯤 된다. 남은 70명 중 20명은 아주 가벼운 상태, 50명은 관리 대상이다. 문제는 이런 이들 가운데 자살이란 극단적인 길을 택하는 비율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9년 전만 해도 45분에 한 명꼴로 자살했습니다. 지금은 31분에 한 명꼴입니다. 어떻게 해결할까요?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아야지요. 그것은 두 가지에서 옵니다. 미련과 동의어인 '욕심', 그리고 '미움'. 그걸 치유해야지요."

욕심과 미움을 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화합이다. " 미국 에 좋은 자료가 있어요. 프로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월드시리즈에 진출하면 자살률이 뚝 떨어지는 겁니다. 한국도 같아요. 2002년 월드컵 때 자살률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그는 화합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다. 계층·세대·가족 간 화합은 어떤 요법이나 약물보다 효과적이다. 그렇게 아픈 영혼들을 만나러 거친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최근 작은 결과물을 냈다. '눈물은 남자를 살린다'는 책이다.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남자에게 눈물은 금기(禁忌) 아니냐'고. 이홍식이 답했다. "눈물은 남자를 살립니다. 울 수 있으면 자기 실패를 인정하고 거듭날 수 있는 시작이 되는 겁니다. 창피하다고 여기지 말고 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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