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동침한 스님, 고3 아들 녀석이 푹 빠졌다
▲ 천장암 고목정에서 바라본 풍경 | |
ⓒ 송성영 |
"아빠, 경허스님 얘기 들어봤어?"
"경허스님? 니가 어떻게?"
"요즘 '길 없는 길'을 읽고 있는데 경허 스님 참 대단한 스님 같더라."
풀무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 송인효 녀석이 얼마 전 작고한 최인호 선생의 '길 없는 길'를 통해 경허 스님을 알게 됐다며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혼 전, 서른 살 즈음에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기 저기 사찰을 기웃거리다가 알게 된 경허 스님. 경허 스님을 접하면서 출가의 꿈을 꾸다가 큰 아들 놈이 태어나는 바람에 그 꿈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들놈이 열아홉이 되어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경허 스님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 스님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화엄경을 뜯어 문을 바르고 벽을 도배했다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투덜거리는 제자에게 축지법을 알려주기 위해 아낙네의 젖가슴을 만졌다거나, 한 평도 채 안 되는 선방에서 모기며 빈대, 구렁이가 몸을 휘감고 지나가도 상관치 않고 참선에 몰두하여 득도를 했고,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경허 스님. 파계승처럼 고기를 먹어가며 술병을 옆에 끼고 거침없는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 스님. 재물 욕심 없이 누더기 옷 한 벌로 저잣거리의 민중들 사이에서 청빈한 삶을 살다간 한국 선문(禪門)의 달마라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
그 시절 내가 그랬듯이 녀석 또한 계율을 깨뜨려가며 거침없는 경허 스님의 무애행에 관심이 많은 듯 했습니다. 더구나 녀석은 가끔씩 술과 담배, 무단외출로 풀무고등학교에서 지켜야 할 10가지 서약을 깨뜨려가며 일부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니 나이 때에 계율을 지켜가며 공부에 매진했다는 거 알지?"
"나도 알지…."
"근데 무애행(無碍行)이 뭐여."
"어떤 일에 막힘없이 마음가는대로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무애행의 뜻만 알지, 그 진면목은 아빠도 잘 몰라. 그 진면목에 다가서려면 엄청난 공부와 수행, 내공이 뒤따라야 하니까…, 경허 스님처럼."
▲ 현대 한국선문의 달마라 불리우기도 하는 경허스님의 영정 | |
ⓒ 송성영 |
조선 중기 휴정 스님 이래 가장 탁월한 승려로 평가되고 있는 경허(鏡虛) 스님은 1846년(헌종 19년)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송두옥,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동욱. 일찍이 부친을 잃은 9세의 동욱은 의왕시 청계사에서 계허선사를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이 무렵의 초기 수행은 '항상 나무하고 물을 길어 부처님과 스승 섬기기에 글을 읽을 겨를도 없었다'고 전합니다.
1860년(15세) 무렵에는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 들어가 23세까지 대강백이었던 만화보선에게 불교 경전을 배웁니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도가사상과 유가를 공부합니다. 그 결과 23세(1868년)부터 34세(1879년)에 이르기까지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만해 한용운은 이 무렵의 경허 스님에 대해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경허약보>에 적고 있습니다.
술, 담배 무단이탈로 학칙을 깨는 사고뭉치 큰 아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술 마시는 횟수와 그 주량이 제법 늘은 인효 녀석에게 "너는 학교에서 공부 안 하고 수업시간에는 뭐 하는겨? 어디 가서 술 마실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고 농담 삼아 물으면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곤 합니다.
녀석이 원하는 공부가 좀 다를 뿐이지 학교에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랍니다. 영어나 수학 과목 보다는 국어나 역사에 더 관심이 더 많고 그보다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시를 지어 노래를 만들고 기타를 쳐가며 신나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빡빡한 학교 일정에 쫓겨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다보니 자꾸만 학칙에서 벗어나는 일탈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술과 담배, 무단이탈에 대한 벌칙으로 예초기를 매고 학교 주변의 풀을 깎는다거나 마을 농장에서 하루 이틀 일손 돕는 것을 녀석은 큰 불만 없이 받아 들입니다. 원치 않는 수학 시간 보다는 이 노동일이 때론 더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녀석의 일탈행위는 분명 잘못이 있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일부 주변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한창 자유로운 의식이 왕성한 청소년들이 왜,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게 되는지 근본적인 물음부터 던져야 하는데 어떤 이들은 충고랍시고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못된 짓을 하냐'는 식으로 꾸짖곤 합니다. 흡연은 나쁜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어떤 학부모가 내게 그럽니다.
"근본적으로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면 그 자식도 피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분명 공동체 생활에 문제가 되지만, 담배가 건강에 나쁜 것이지 담배를 피운다 하여 누군가를 해코지 하거나 괴롭히는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그게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입학하기 전에 담배 피우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는데 당연히 지켜야죠.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은 학생들이 학칙을 어기면 학교가 무너질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 들려왔습니다. '그런 힘없는 학교라면 애초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풀무고등학교는 학생들이 학칙을 어긴다 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 일탈하는 녀석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힘있는 학교라 믿고 내 새끼를 보냈습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먼저 우리 집 녀석이 학칙을 어긴 잘못이 있기에 자칫 부질없는 논란에 휩싸일까봐 그만 두었습니다.
그 학부모는 학칙을 어기는 학생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교의 명예에 누를 끼치거나 자신의 자식처럼 학칙을 잘 지키는 아이들을 전염시켜 피해를 입히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 두려움으로 학칙을 어기는 학생들을 비인간적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이지만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바른 원칙에 얽매여 그 원칙에서 벗어나면 인간성까지 매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올바른 사회의 도덕 규범이나 종교의 계율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올가미를 씌워 누군가를 궁지로 몰고 간다면 그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이치가 그렇듯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학칙을 잘 지키는 학생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학생이 있기 마련입니다. 학칙을 잘 지키는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고 학칙을 어기는 학생들 또한 다른 어떤 것에는 심지가 곧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큰 녀석은 학칙을 어기는 문제아이긴 하지만 치열한 대학 입시 경쟁보다는 생태적인 삶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노래를 통해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릴 줄 알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보낸 통지서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잘 받아 들이는 학생'이라 적고 있듯이 말입니다. 또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덩달아 아파할 줄 합니다. 촛불을 들고 부조리한 사회 문제에 분노할 줄 압니다.
경허 스님은 주정뱅이 중노릇만 했을까요?
동학사 산중의 대중들이 한자리에 모인 법회가 열릴 때였습니다. 경허 스님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동학사의 강사스님이 먼저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삐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고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아야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사람도 마음이 불량하지 않고 착하며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강사스님의 바른 말씀에 숨을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경허 스님의 법문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본사 강사스님은 '반듯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하지 못한 인간은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경허 스님을 막힘이 없는 선(禪)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계율을 깨고 술과 담배, 고기조차 가리지 않고 먹어가며 기행을 일삼은 이단자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불교를 중흥시킨 대선사라기보다는 불교계에 악영향을 주었던 삿된 스님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계율을 어겨 주색과 고기 먹기를 꺼리지 않는 후대의 일부 스님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줬다는 것이지요.
경허 스님은 그 재능과 함께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겉으로 구차스런 꾸밈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이 경허 스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간의 이익과 손해, 애증, 헐뜯음과 찬양,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초월하시어 큰 산과 같이 부동하시었다. 가고 싶으시면 가고 머물고 싶으시면 머무시어 타인의 눈치를 보아 우회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탓에 먹고 마심을 자유롭게 하고 노래와 춤을 맘대로 하는 등 거침없이 행동함으로써 남의 의심과 비방을 사게 되었다…."
경허 스님 자신 또한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술도 때론 빛을 내고 색(色) 또한 마찬가지/탐내고 성내고 번뇌는 영원한 것/부처든 중생이든 그런 것 나는 몰라/일생에 한 일이란 주정뱅이 중노릇 뿐."
경허 스님은 과연 자신의 말대로 '주정뱅이 중노릇'만 했을까요? 해인사 시절 경허 스님은 사하촌의 주막에 들러 술을 잔뜩 들이키고 비틀대며 절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취한 상태로 대적광전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젊은 스님들은 경허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적광전에 숨어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대적광전의 부처님 앞에 선 경허 스님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턱밑에 세워 약간이라도 비틀거린다면 칼날이 턱을 뚫고 들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렇게 술 취한 상태로 칼날을 턱밑에 세운 채 곳곳하게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한 여인을 조실 방으로 들여 숙식을 같이 했다고 합니다. 제자인 만공 스님은 몰래 조실 방을 엿보았는데 이 여인이 나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만공스님은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문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누군가 경허 스님을 친견하러 오면 "조실 스님께서 주무십니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경허 스님은 이 여인에게 밥을 먹여주고 피고름을 닦아 줬다고 합니다. 훗날 만공 스님은 "다른 모든 것은 스승 경허 스님을 흉내 낼 수 있으나 그 같은 일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의 큰 어른이신 조실 스님이 여인네를 방으로 들여 동침한 것은 엄한 계율을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의 기행을 흉내 내며 계율을 어기고 고기와 주색에 빠져 있는 스님들은 과연 나병 환자와 동침할 수 있는 소름 돋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천장암에는 절벽 위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탐욕스런 중생을 단적으로 표현해 놓은 한 폭의 벽화가 있습니다. 절벽 위에서는 성난 코끼리가 쫒아오고 그 아래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쥐들이 갉아 먹고 있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벌집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먹겠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경허 스님의 기행만 흉내 내가며 신도들의 주머니 털어 주색에 빠져 있는 어리석고도 탐욕스런 스님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 천장암 벽화 | |
ⓒ 송성영 |
또다시 사고 친 아들과 함께 천장암으로
인효 녀석이 경허 스님을 다룬 최인호의 '길 없는 길'에 푹 빠져 있을 무렵,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인효 아버님 학교에 좀 와 주셔야겠는데요."
무단외출 사건이 연이어 터졌던 것입니다. 친구 생일이라 하여 치킨을 사먹으러 무단외출 했다가 경고를 받았는데 그 다음 날, 선배들이 찾아와 다시 무단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녀석 말로는 선배들이 찾아왔을 때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너무 죄송해서 나가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녀석은 선배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모처럼만에 후배 보고 싶어 찾아온 선배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손에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며칠 간 학부모에게 맡깁니다. 담임 선생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합니다.
"인효가 절에 가고 싶다는데, 집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녀석 말로는 집에 있으면 늘어지고 게을러 질까봐 스스로 마음 다스릴 수 있는 조용한 절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마음 쓰려 애쓰고 있는 선생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한 마음이 앞섰지만 녀석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에 한편으론 기뻤습니다. 사실 고등학생일 뿐, 열아홉이면 스스로 판단하고 제 앞길을 개척해 나갈 성인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다들 그 나이에 대학 입시에 파묻혀 성인들만큼이나 부쩍 자란 몸과 마음을 펼쳐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2학년 때, 녀석이 기숙사에서 무단가출을 하여 며칠 동안 홀로 떠돌아 다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녀석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옛집과 호남고속철도 공사로 온통 짓뭉개진 산과 마을을 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녀석은 그 길목에서 '길을 찾으러 떠났다가 길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잃고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는 시를 썼고 그 시를 노래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잘됐다. 공부하기 싫은데 억지로 교실에서 백날 앉아 있으면 뭐 하건냐. 절에 가고 싶다구혔지. 너 요즘 경허 스님에 관심 많응께 아빠하구 천장암에 다녀오자."
그렇게 학칙을 어긴 무단외출의 벌로 녀석과 함께 충남 홍성 풀무고등학교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천장암(서산시 고북면 장요리)으로 데려 갔습니다. 사실 녀석은 친구들을 꼬드겨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산길을 걸어걸어 찾아간 이후 두 번째로 찾아가는 천장암이었습니다.
나는 녀석이 경허 스님 얘기를 꺼낸 이후 네 번째 길이었습니다. 서산 가야산 자락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놓고 지척에 있는 천장암을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천장암을 지키고 있는 허정 스님을 만나 차담으로 안면을 트고 있었고 경허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문헌들을 통해 접하고 있었습니다.
▲ 하늘이 감춰 놓은 암자, 천장암을 지키고 있는 허정 스님. | |
ⓒ 송성영 |
▲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천장암 올라 고목정에 서면 멀리 서해안이 보이고 그 해안선 안쪽으로는 천수만 간척지에 가로막힌 간월호가 보인다. | |
ⓒ 송성영 |
'하늘이 감춰 놓은 작은 암자', 천장암과 경허스님의 자제들
연암산(제비바위 산) 자락, 우거진 송림 사이에 자리 잡은 천장암(天藏庵). 천장암은 눈앞으로 비산비야의 물결을 펼쳐놓고 고요히 앉아 있는 작은 암자입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들녘 너머 저 멀리로 서해안이 보이고 그 해안선 안쪽으로는 천수만 간척지에 가로막힌 간월호가 보입니다.
경허 스님은 자암거사에게 보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천장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천장암이 좋다 함은 한쪽은 산이요 한쪽은 바다라. 하지만 이곳은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만 올 수 없는 곳이 아니라 통인달사(通人達士)들도 오고 갈 수 없다. 통인달사들만이 오고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와 조사들도 그러하다. 이곳을 어찌 가히 말할 수 있으랴"
천장암은 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하늘이 감춰놓은 암자'입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전국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그 중간 중간 18년을 머문 곳이라 합니다.
팔도에 이름 떨쳐가며 동학사 강단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경허 스님에게 삶의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879년(34세)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여행 중에 천안 근처의 한 마을에서 창궐한 콜레라를 만나고 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이 맥없이 죽어나가는 비참한 현장을 목격한 경허 스님은 그 충격에 휩싸여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강의를 폐지하고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참선을 시작해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881년 연암산 천장암에 머물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보림(保任. 불교에서는 '보임'을 '보림'으로 읽고 있다. 보림은 깨달음을 이룬 후 그 깨달음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을 행합니다. 경허 스님의 보림은 필사적이었던 동학사에서의 참선보다 더 극심한 고행으로 이어집니다.
천장암에는 아직도 경허 스님이 극심한 고행을 했다는 한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방이 남아 있습니다. <경허집>에 보면 그 보림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천장암에 주석하실 때 누더기 한 벌 옷으로 추운 겨울이나 찌는 듯한 여름에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으시고 모기와 빈대가 몸을 물어뜯고 이들이 옷에 가득하여 온몸이 헐어서 벗겨져도 고요하고 의연한 자세를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벽을 뚫고 들어와 어깨와 등에 올라가 서리고 있는 것을 함께 있는 사람들이 일러 주어도 태연한 마음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도에 의정이 깊이 익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한번 앉아 여러 해를 지냈지만 찰나와 같이 보내셨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천장암 선방에서 보림 과정을 마친 경허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부릅니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 몰록 삼천 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 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그렇게 경허 스님이 득도를 한 후 보림 과정을 거쳐 설법한 곳이 천장암이었고 당대 선림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을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곳도 천장암이었습니다. 조계종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세 명의 제자들을 흔히들 세 달(月)이라고 부릅니다. 수월은 북녘 하늘(만주 지방)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녘 하늘(영남 지방)에 뜬 하현달, 만공은 그 가운데(호서 지방) 뜬 보름달이 됐다고 합니다.
일제의 식민불교정책 강행에 항거하며 한국 전통불교의 고수투쟁(1941년 선학원에서 조선고승대회)을 주도했던 만공월면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선문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덕숭산문의 실질적인 지도자입니다.
평생 소를 치고 밭을 갈며 나라를 잃고 북간도에 정착한 우리 민중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먹였던 수월 스님은 호랑이가 애완동물처럼 따르고 찧고 있던 방아공이가 허공에 떠 있는 등의 많은 이적을 보여주었다는 근대의 고승입니다.
영남지방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해월 스님은 가는 절마다 개간 사업을 벌여 노동을 중시했고 산새들이 날아와서 몸에 앉을 정도로 자비심이 깊었다고 합니다. 1937년 당시 땔감으로 쓰이던 솔방울 가득한 자루를 메고 선 채 그대로 열반한 근세의 도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경허스님은 천장암에서 당대 선림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천장암 주변에는 해월스님이 수행했다는 바위 굴이 있다. | |
ⓒ 송성영 |
이 무렵 천장암에서 지내던 경허 스님은 주로 충청 경상 일대의 사찰을 돌며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가라앉아 있던 불교에 선풍(禪風)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한동안 을 가야산 해인사에서 보내게 되고 58세가 되던 1903년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옵니다. 그 해 가을, 젊은 날의 수행처 였던 천장암으로 돌아오면서 경허 스님은 당시의 심경을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누더기 옷에 지팡이 하나로 삼수갑산으로 떠난 경허스님
1906년 경허 스님은 승려로서 명성이 가장 돋보일 61세 나이에 다시 길을 나섭니다. "옷이 헤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 먹세"라며 평생 재물을 멀리하여 한곳에 머물러 본 일이 없는 스님은 누더기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새털처럼 가볍게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오지 북방고원으로 떠납니다.
스님이 찾아 든 곳은 유배지로서도 유명한 한반도 최고의 오지 삼수갑산. 거기서 스님은 머리를 기르고 박 난주라는 이름으로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냅니다. 훗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김탁 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가며 대선사로서의 명성을 세간의 풍진 속에 묻어 버립니다.
"주모와 장사꾼들 틈에 섞여 지내니/자취를 감추기엔 이것이 제격/저물기도 전에 산에서 날쌘 표범 내려오고/깊어가는 가을 찬바람에 기러기 떼 북쪽에서 날아오네/금과 옥을 탐내지 않음은 인간의 보배이니/구름과 안개 속에서 물질 밖의 청한(淸閑)함도 잊었네/초탈하여 의심 없는 마음을 스스로 얻은 것은/다만 지난날 조사(祖師)의 현관(玄關)을 타파했기 때문이네"
<경허집>에는 북방고원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남긴 시가 90여 편, 이 시편 속에 경허 스님과 교류했던 26명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의 시에는 술과 벗들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황린리 가는 길 왜 이리 슬픈가/도탄에 빠진 생령들 지금도 같은 모습/풀어진 머리 베 짜는 처마 밑에 서린 서리 같고/밥 짓는 손 갈라지고 나무와 낫은 이리저리/어느 부모가 병역 걱정하지 않으며/밭과 논이 있다 해도 벼슬아치들 토색질에 못 견디네/천일주를 구하기 힘든 것 잊으려 해도/가만히 일어나는 생각을 금할 길 없네"
평소 경허 스님은 누가 큰 도시로 나가 교화하기를 권하면 "나에게 서원(誓願)이 있는데 경성(서울)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스님이 향한 곳은 언제나 낮은 곳, 민중들의 웃음과 울음이 있는 저잣거리였던 것입니다.
세수 67세. 법랍 59세. 1912년 4월 25일. 경허 스님은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도 하동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입적하기 전 날, 아이들이 서당 마당의 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고 합니다.
"아 참 피곤하구나."
다음날 새벽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게송을 남깁니다.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O 이는 다시 뭘꼬?"
스님이 입적한 그 다음해 혜월과 만공이 스승의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모셨는데 당시 스님의 저고리 속에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경허 스님은 구름에 언듯 언듯 가려져 있는 큰 산입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산의 모습을 전부로 알게 되면 그 큰 산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요.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큰 산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이 두 편의 시는 경허 스님의 일생이 잘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게송이 선을 통달한 대선사의 면모를 그대로 반영했다면 두 번째 게송은 누더기옷 한벌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고통 받는 민중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쓸쓸이 세상 떠난 시인 송경허 였습니다. 이 두 편의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허 스님에게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한 몸이었습니다.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였던 것입니다.
'불량 학생' 아들, 경허 스님 노래한다
큰 아이 인효와 함께 찾아간 천장암은 선방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주변이 어수선했습니다. 천장암 주지 허정스님은 늘 그랬듯이 자그마한 차실로 안내합니다. 차를 마시며 아들놈이 경허 스님에 푹 빠져 있다하니 기쁘게 반기며 차실에 꽂혀 있는 경허 스님에 관련된 책들을 서슴없이 내줍니다.
"고3이라면 대학 가면 뭘 전공하고 싶어 하나요."
"그냥 대학 안 가고 노래 만들어 가며 농사 짓겠다가 군대 간다고 하네요."
"농사를 짓겠다고, 야 대단하다. 노래는 어떤 노래를 부르죠?"
"요즘 애들 정서와 다른 시골 촌놈 정서가 묻어 있는 노래를 지가 직접 만들어 부르고 있죠."
스마트 폰에 저장되어 있는 '달빛 속으로'라는 녀석의 노래를 스님에게 들려줬습니다.
"아, 괜찮네. 그렇잖아도 이번 가을에 경허 선사 바로 알기 학술세미나도 하고 또 작은 음악회를 가길 예정인데 여기 와서 노래하면 어떨까?"
말없이 스님이 따라주는 차만 홀짝 홀짝 마시던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좋아 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습니다.
"녀석이 경허 스님 좋아하니까, 경허 스님 생각하면서 천장암 가는 길,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어떨까요?"
"아, 그거 좋겠네요."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히던 녀석이 졸지에 평소 마음에 품고 있는 경허 스님이 머문 천장암에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로 하였으니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겠습니까?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대로 찌그러지면 찌그러진 대로 불량하면 불량한 대로 다 쓸모가 있다는 경허 스님의 말씀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불량 학생으로 학교에서 쫓겨 나온 녀석이었지만 다 쓸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 천장암 주지 허정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불량 학생' 송인효. 이 날 10월 12일에 열리는 천장암 작은 음악회에서 '천장암 가는 길' 창작곡을 부르기로 했다. | |
ⓒ 송성영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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