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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도깨비-1 2012. 4. 22. 22:17

숙종(肅宗, 1661년 음력 8월 15일~1720년 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제19대 이다. 는 순(焞)[1], 는 명보, 사후 시호는 숙종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이다. 이후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희순왕(僖順王) 이다. 현종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재위기간 중 강대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하였으나, 붕당간의 살육과 감정의 골을 패이는 계기가 되었다. 잇따른 배신과 살육으로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균(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창덕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1701년)는 조선의 왕 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로 민진후, 민진원, 민진영의 누이이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부덕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영빈 김씨의 입궐을 주선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를 불러다가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와는 모계로 10촌간이다.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 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1688년 후궁 장씨(소위 장희빈)가 아들 (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폐출된 지 6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폐인(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이다.[1]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2],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3]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4]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주해 1]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소론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민씨가 복위된 뒤 왕세자 윤(경종)이 민씨 아래로 입적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자로서 아비의 뒤를 잇는 자는 적모에게 입적한다'는 예를 따른 것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종이 장씨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민씨에게 줘버렸다는 것은 와전이다. 경종은 기사환국 전 원자 명호를 받았을 때에도 당시 정궁이었던 민씨에게 입적되었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1] 음력 9월 19일[2] ~ 1701년 음력 10월 10일)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는데 사실여부는 불확실하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산림숭용과 국혼물실을 당의 제1 강령으로 추구했던 서인,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에게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숙종에게 자진을 명 받아 사망하였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의 범인이자 3대 환국(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정의하여 비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집필되어 민간으로 보급된 인현왕후전, 수문록 등의 언문 소설과 야사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 서적과 드라마 등에 중요 사료로 활용되어 최근까지 희대의 악녀, 요화로 평가 매도되어 손가락질 받아왔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불거지고, 소설 인현왕후전이 당초에 알려진 것처럼 인현왕후를 곁에서 모신 궁녀가 쓴 것이 아닌 영정조대 남성[주해 1]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학계의 학설이 있기에 이르자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겨나 정쟁의 희생양, 신분제의 희생양 등으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