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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덕종, 경릉(敬陵)/ 인수대비- 폐비윤씨, 연산군

도깨비-1 2012. 4. 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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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世祖, 1417년 9월 29일 ~ 1468년 9월 8일[1], 재위 1455년~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임금, 시인이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다. 는 유(瑈), 는 수지(粹之). 생전의 존호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였고, 사후 정식 시호는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약칭으로는 시호는 혜장대왕(惠莊大王)으로 불렸다.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서,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용, 금성대군 유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기도 하다. 즉위전 호칭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초봉은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여러차례 개봉된 끝에 수양대군이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反正)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고, 역대병요 등을 편찬할 때 만난 권람 등을 통해 한명회를 소개받고, 문종 연간에 한명회를 통해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조정을 장악해 나간다.

1455년(단종 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 인, 안평대군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정난공신 1등관에 녹훈하였다. 1455년 조카 단종으로부터 명목으로는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하였으나, 훈신들의 압력에 의한 강제 퇴위였고 이는 이후 사육신, 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으나 후일 죄를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사육신 등의 대량 학살로 공신 세력이 강성해지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468년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傳位)하고, 9월 8일에 수강궁(壽康宮)의 정전(正殿)에서 승하하였다.

 

덕종(德宗, 1438년 ~ 1457년)은 조선 초기의 왕족이자 왕세자, 작가이다. 세조의 장남이자 예종의 형이며 성종·월산대군 형제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정희왕후 윤씨이다. 145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만에 2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사후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바로 의경왕에 추존되었다가 회간왕으로 추존되고 뒤에 덕종의 묘호가 올려졌다. 정식 시호는 덕종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德宗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며 왕에 추존되기 전에는 의경세자(懿敬世子)로 불렸다. 이름은 장(暲), 초명은 숭(崇), 자는 원명(原明)이다.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음력 9월 8일 ~ 1504년 음력 4월 27일)는 조선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성종(成宗), 월산대군 형제의 모후이다. 시호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며,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져 있다.

의정부좌의정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原府院君 襄節公 韓確)의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여성을 위한 유교 서적인 《내훈(內訓)》의 저자로 유명하며,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한 반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종(睿宗, 1450년~1469년, 재위 1468년~1469년)은 조선의 제8대 임금이다. 는 황(晄), 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시호는 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세조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450년 경오 정월 정축일에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海陽大君)으로 봉해졌으나 형인 의경세자1457년 까닭없이 갑자기 죽어버리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1살 때인 1460년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세자빈 (장순왕후)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1461년 음력 11월 30일에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며칠뒤 산후병으로 17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2년뒤인 1463년 한백륜(韓伯倫)의 딸이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으로 들어가 예종이 즉위 후 왕비로 책봉되는데 그녀가 안순왕후이다.

1468년 음력 9월 7일에 병환이 깊어진 세조의 선위로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19세 때 즉위(卽位)하였다. 상왕으로 물러나게된 세조는 다음날인 8일에 승하했다. 그런데 예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아직 성년인 20살이 되지 않았으므로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국정은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세조가 지명한 3명의 신하들이 내린 결정을 형식적으로 결재하는 원상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종의 재위 기간은 14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468년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으며, 1469년에는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그 외에도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을 드디어 완성했으나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1469년 11월 28일 진시(辰時)에 자미당(紫薇堂)에서 훙(薨)하였다.

예종은 원상제도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정희왕후의 강력한 통치로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예종이 승하한 당일 날, 왕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명으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계승서열 첫번째인 원자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서열 두번째인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군은 각각 나이가 너무 어리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제외되었으나 실상은 왕대비(정희왕후) 와 수빈 한씨 (인수대비=소혜왕후),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 등의 정치적 결탁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후 원자는 왕자로 낮춰졌고 제안대군으로 봉해져, 후사도 못남기고 병으로 요절했던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번째 아들)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1457년 음력 7월 30일~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1469년 음력 11월 28일~1494년)은 조선의 제9대 이며 시인, 유학자이다. 는 혈(娎), 초명은 아무. 사후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일찍 죽어 정희왕후와 훈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 대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친정 이후에는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여색을 좋아하여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 이는 훗날 아들 연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 ~ 1482년 음력 8월 16일) 또는 제헌왕후(齊獻王后)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폐출되었으므로 보통 폐비 윤씨라 부른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의정부영의정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1]와 신씨의 딸로, 훈민정음 창제와 세조 반정에 가담한 신숙주의 외조카이며 윤관의 11대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성종의 후궁 문제로 성종과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성종의 용안을 긁은 일로 인해 폐서인 후 사사되었다. 사사 당시 피를 토한 금삼을 친정어머니 고령신씨에게 넘겨주며 아들이 자라면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탈되었다.

 

연산군(燕山君, 1476년 음력 11월 7일 (양력 12월 2일) ~ 1506년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는 융(㦕)[1].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고 있었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는 것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갈등하다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 한다. 이때 갑자사화 때에는 훈구파 역시 대량으로 숙청하여 사림, 훈구 양측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된다. 중종 반정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망한다.

시호는 폐위되었기에 없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다.[2] 진성대군(중종)의 이복 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지목되고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