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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완벽한 <추적자>가 남긴 최악의 실수

도깨비-1 2012. 6. 18. 16:37
완벽한 <추적자>가 남긴 최악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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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다음] 방송 
글쓴이 : 엔터미디어 원글보기
메모 : - < 추적자 > , 백미인가 옥에 티인가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사람이 원래 그렇죠. 모두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법과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도 죽이고, 총리 자리면 평생을 지켜온 신념도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들을 하죠.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백홍석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SBS 월화 미니시리즈 < 추적자 > 6회 방영분 중 백홍석(손현주)과 강동윤(김상중)의 독대 장면에서 발췌한 강동윤의 대사다. < 추적자 > 는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극작이 육중한 위력을 발휘하는 작품이지만 이 장면의 분위기는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밀도 높게 짜여진 실내세트에서 인물들은 연극적인 대사와 연극적인 제스처를 보여준다. 니노 로타의 < 대부 > 테마를 연상케 하는 사운드트랙 또한 비장미를 더한다. 거기에 너무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같은 두 인물, 백홍석과 강동윤이 있다.

헌데 현재까지의 방영분 중에서도 단연 백미로 손꼽히는 저 장면이 사실 고전극의 룰에서는 꽤나 벗어나 있다. 드라마 작법서의 원조라 할 < 시학 >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사건을 묘사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바로 모방과 서술이다. 여기서 모방은 연극무대의 영역이고, 서술은 시인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극에서 사건이란 배우의 연기(모방)에 의해 묘사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사건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황금률을 오늘날의 극인 영화에 빗대어서는 유명 감독 마틴 스코시즈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등장인물이 구어체로건 문어체로건 연설을 늘어놓거나, 대사를 통해 제목의 뜻을 설명하거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영화를 때때로 보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최악의 실수다."

개인적으로는 이 '최악의 실수'를 꽤 자주 목격한다는 데에 한국 드라마 애청자로서의 슬픔이 있다. 게다가 야심 넘치는 장르 드라마들에서 이런 실수를 흔하게 만난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실수라는 인식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다양한 계층의 대중들이 시청하는 텔레비전이기에 한층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하지만 굳이 강동윤이 저 연설을 늘어놓지 않아도, 한시도 < 추적자 > 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시청자들이라면 그가 어떤 가치관을 지닌 인물인지, 백홍석의 친구인 윤창민(최준용)이 어떤 맥락으로 배신해야 했는지 정도는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을까?

당연하게도 < 추적자 > 의 가장 빛나는 부분들 역시 '사건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에서 나온다. 이 드라마의 탁월한 미덕 중 하나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사람은 다 똑같다'는 강동윤의 말을 한순간도 잊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일회적인 위안을 위해 매체들은 끊임없이 이분법을 생산한다. 피아를 명확하게 나누고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들도 매일같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을 언급하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명확하게, 혹은 말 한 마디로 선을 긋고 단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던가. 우리 스스로는 그 요지경 세상의 굴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 추적자 > 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을 상대화시켜서 그 함정을 벗어난다. 백홍석으로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거악 강동윤도 서회장(박근형) 앞에서는 연민을 자극하는 약자가 되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을 재벌가의 딸 서지수(김성령)도 애정없는 남편 강동윤 앞에서는 가련한 아내에 불과하다. 악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서회장은 또 어떤가. 딸에게 용돈을 받자 천진난만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조차 악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반대의 예시. PK준(이용우)의 공판이 열리는 법정에는 수많은 여학생 팬들이 찾아와 뺑소니를 저지른 그를 응원했다. 만약 사고를 당한 이가 다른 여자애였다면, PK준의 열성팬이었던 백수정(이혜인) 또한 그 자리에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저마다의 입장에 대해 맹목적인 몰입과 판단을 거부하는 < 추적자 > 의 입체적인 설계는 이처럼 설명이 아니라 사건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대목들에서 힘을 발휘한다.

훌륭한 예술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 추적자 > 는 이토록 평면적이지 않은 캐릭터와 사건들을 통해, 드라마로서는 흔치 않게 고통에 가까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그런 까닭에 6회의 독대장면에서 오갔던 장광설들이 더욱 안타까운 사족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서두에 소개한 강동윤의 저 대사는 < 추적자 > 의 세계관을 알뜰하게 요약 정리한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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