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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기적의 나라'의 혹독했던 겨울 이야기

도깨비-1 2011. 9. 5. 14:57


[강천석 칼럼] '기적의 나라'의 혹독했던 겨울 이야기

'福祉 원형 경기장' 사자는 정직한 정치인 먼저 잡아먹어
박근혜 前 대표, 사자 앞에서 의연했나 움츠렸나

 

 - 강석천 주필 / 조선일보 2011. 09. 03.
 

   박근혜 전 대표가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복지정책의 방향에 대해 입을 열었다. "(무상급식 문제에) 과도하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또 시장직까지 걸 건 아니었다"고 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지원 가능성을 묻자 "우선 복지에 관한 당의 정책이 재정립되는 것이 필요하다"며 "복지를 확충해 가는 게 맞긴 하지만 뭐든지 무상으로 하자는 것은 문제"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복지관(觀)을 "재정 여건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한국형 맞춤 복지, 생애 주기별(週期別) 복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네덜란드는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의 나라다. 땅이라고 해야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바다를 빼면 3만7305㎢, 거기 1650만명이 옹기종기 몰려 산다. 이 작은 나라의 작년 수출이 5720억달러(한국 4660억달러), 수입 5170억달러(한국 4250억달러)에 국민총생산이 우리와 거의 맞먹고 1인당 GDP는 우리의 갑절을 넘는 5만달러를 돌파했다. 세계의 경제연구소들이 네덜란드를 강소국(强小國) 대표로 꼽고 미국 신문 월스트리트저널이 '기적의 나라'라는 특집을 실을 만하다. 그러나 이 세계의 우등생이 겪었던 혹독한 겨울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80년대가 열리자마자 네덜란드 경제성장이 사상 최하 수준으로 수직 추락하고 실업률은 14%로 수직 상승했다. 실업 관련 사회보장과 직업훈련프로그램 대상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실업자 숫자는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7%까지 치솟았다. 기업이 잇따라 무너지고, 노조 가입자의 17%가 직장을 잃고, 25%는 전직(轉職)복지서비스의 대상으로 밀려나고, 노조 조직률은 35%에서 25%로 굴러떨어지고, 월급쟁이들의 가처분소득은 3년 사이에 10%가 줄었다. 세계 최고의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가 네덜란드를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복지 모델'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망신을 산 게 발병(發病) 직전인 1977년이다. 전문가들은 이 급성(急性)질환을 '과도한 비용이 들고 지속 불가능한 복지 정책이 불러온 병(病)'으로 진단하고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란 이름을 붙였다. 1960년대 중반 다른 나라 복지모델의 설계도면(圖面)을 빌려다 서두른 복지정책이 탈을 내고 만 것이다. 당초 20만명으로 어림잡아 설계했던 장해보험 수혜자가 100만명을 웃도는 등 대부분의 복지대책이 애초 설계보다 몇 배 예산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행운이 다한 건 아니었다. 정직한 정치인이 남아있었다.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당 연립 정권의 루버스 총리는 TV에 나와 '네덜란드는 기진맥진한 환자'라고 고백하며 "복지 축소에 따른 추운 겨울의 고통을 견뎌내자"고 호소했다. 곧이어 전체 복지 수혜자에 대한 엄격한 자격 요건 재조사가 시행됐고, 기업과 노조 간에 맺어진 월급 동결(凍結)을 내용으로 한 '바세나르협약(協約)'이 강제력을 발휘하고, 각종 법률 개정이 뒤따랐다. 복지 축소 내용이 발표될 때마다 100만명의 시위대는 전국을 헤집었다. 그러고도 네덜란드가 '네덜란드 병'을 벗어던지는 데는 10년 세월이 필요했다. 네덜란드는 복지국가가 등장한 이래 '복지 병'에서 회복한 유일한 나라다.
   네덜란드 국민은 자신들을 치료해준 의사의 은혜를 어떻게 갚았을까. 놀라지 말자. 정권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걸로 감사를 표시했다. 연립정권에 참여한 두 정당 모두 당원이 3분의 1에서 4분의 1 가까이 감소했고 지지율은 25% 이상 폭락했다. 네덜란드 국민만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것이 아니다. 독일 경제가 그런대로 버티는 것은 사회당 출신 슈뢰더 전 총리의 복지정책 궤도 수정이 뒤늦게 약효(藥効)를 발휘한 덕분이다. 독일 국민 역시 슈뢰더를 정권에서 쫓아내는 걸로 보답했다. 국민은 어리석기도 하다. EU의 특별 지원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그리스의 병(病)이 깊어진 것은 현 총리 파판드레우의 아버지가 총리 시절(1981~1989)에 분수 넘치는 복지정책으로 국민을 홀렸던 탓이다. 그런데도 그리스 국민은 여태 그를 역대 최고의 총리로 꼽고 있다. 영국병의 주치의(主治醫)였던 '철(鐵)의 여인' 대처 총리조차 복지문제 앞에선 몸을 사렸다. '복지 축소'라는 공약을 꺼내기 겁나 '세금 축소'로 말을 둘러 정권의 자리에 올랐다.
   세계 어디에서든 '복지라는 이름의 원형(圓形)경기장' 안 사자들은 정직한 정치인을 맨 먼저 잡아먹는다. 물론 마지막에는 거짓말 정치인도 화난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와 함께 진실의 순간이 닥친다. 박 전 대표는 굶주린 사자 앞에서 의연했던 것일까 아니면 움츠렸던 것일까. 복지국가의 유혹에 좌우(左右)의 정치인·관료·기업인·근로자·학자·언론인에다 종교인까지 합세해 온 국민이 허둥대는 대한민국은 이렇게 흘러가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진실의 순간과 만나게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