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만물상] 흥남 철수와 레인빅토리號

도깨비-1 2011. 6. 26. 23:03

 
[만물상] 흥남 철수와 레인빅토리號
 

김태익 논설위원/2011. 06. 24. 조선일보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6일 미군과 피란민 7009명을 태운 미국 상선 레인 빅토리호가 원산항을 빠져나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근처

흥남부두에서는 배에 오르지 못한 10만여명이 울부짖었다. 트럭·대포 같은 군 장비를 먼저 싣고 빈 공간에 난민을 태운 탓에 배 안도 지옥이긴 마찬가지였다. 사람 위에 사람이 포개 앉고 그 위로 구호용 주먹밥이 날아다녔다. 그때 "응애" 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극한 상황에서도 태어난 새 생명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이틀 후 배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승선 인원은 '7010명'이 돼 있었다.
▶2차대전 초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에 포위됐던 연합군은 30만 병력을 무사히 철수시켜 반전(反轉)의 계기를 만들었다. 6·25 때 압록강까지 쳐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참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계속 버텼다간 10만여 병사가 떼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그러나 흥남 철수는 자유를 찾으려는 10만여 민간인도 함께 살렸다는 점에서 됭케르크 작전과 달랐다.
▶아먼드 미 10군단장은 처음엔 민간인은 당시 함남 지사와 시인 모윤숙씨의 작은아버지, 목사 한 사람까지 세 명만 데리고 가겠다고 한국군에 통보했다고 한다. 한국군 지휘부는 "민간인 중엔 어차피 공산당에 학살당할 사람이 많으니 우리가 쏴죽이고 가겠다"고 맞섰다. 함흥이 고향인 10군단 한국인 고문 현봉학씨가 아먼드 군단장과 포니 참모장 설득에 나섰다.
▶사상 최대의 민간인 피란작전을 위해 19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동원됐다. 작은 목선에 너무 많은 사람을 태워 배가 가라앉기도 했다. 부두 앞바다에 설치된 기뢰를 건드려 폭파된 배도 많았다. 하나하나의 배가 제각기 삶과 죽음을 가르고 숱한 이산의 아픔을 낳았다.
▶거제시가 미국 캘리포니아 항구에 정박돼 전쟁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는 레인 빅토리호를 포함해 흥남 철수에 참가했던 미국 배 세 척 중 하나를 사들이기로 했다. 2015년 문을 열 흥남철수기념공원에 두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사(史)의 가장 힘들고 아픈 기억을 관광 콘텐츠로 활용하겠다는 발상에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아갔음을 느낀다. 내일은 6·25 61주년 되는 날. 레인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그 아이도 어느덧 환갑을 넘겨 누군가의 할머니가 돼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