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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칼럼]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 하나?

도깨비-1 2011. 4. 19. 10:52


[김대중 칼럼]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 하나?

'시일야방성대곡' 만으로도 장지연은 영원한 항일지사
서훈 박탈한 김황식 총리는 그 글을 읽어보기나 했을까
보수의 철학 없는 이 정부는 이쪽 저쪽 기웃거리기만 해

    김대중 고문/ 조선일보 2011. 04. 19.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언론 관계 상(賞) 중에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 '위암 장지연(張志淵)상'이다. 이제 나는 그 상을 반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게 됐다. 상(賞)의 본질은 곧 명예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고(故) 장지연 선생의 '친일(親日) 행위'를 인정하고 1962년 그에게 수여했던 건국공로훈장을 박탈함에 따라 이 상의 명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의 공적에 대해 민간단체가 이런저런 의견을 말할 수는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혹독한 식민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정부의 공식 견해가 중요하며 유권해석은 결정적 무게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이명박 정부가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단정짓고 과거 정부가 그에게 줬던 훈장을 도로 빼앗기로 결정한 이상, 나는 '친일인사를 기려서' 만든 상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졌다.
   장지연상이 작년까지 21회 수여됐으니 이 상을 받은 20인 이상의 언론인과 20여명 한국학 교수 등의 '명예'도 땅에 떨어진 셈이다. 이분들 역시 상의 무게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장지연 선생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오늘에 이르러 목 놓아 크게 통곡함)'이라는 논설을 항일언론의 상징으로 배워온 세대와 그렇게 기술한 교과서, 역사책, 기념비석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시일야방성대곡'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메어져 온다. 나라를 잃게 된 데 대한 통분과 억울함을 이처럼 강렬하게 전달한 글을 일찍이 읽은 적이 없다. 후세 언론인 누구도 그런 명문(名文)을 쓸 능력이 없다. 장지연 선생이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 한 편만으로도 그분은 당대에 남을 항일지사였고 민족언론인이었음을 그 글의 맥박을 짚어 증언할 수 있다.
   나는 서훈취소를 의결한 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묻고 싶다. 아니 그가 지방언론에 썼다는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김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독립운동 공로도 인정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서훈취소가 마땅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나는 김 총리가 말을 거꾸로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그는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김 총리의 '인식'도 그렇고, 국무회의에서 말 한마디 없이 통과시킨 국무위원들의 무식함이 부끄럽다. 서훈이 취소되기 위해서는 서훈이 있은 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서훈 당시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어야 한다. 그러나 장지연 선생의 공과는 이미 1962년 서훈 때, 또 2005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심사 때 밝혀지고 드러난 것이다. 이것을 이제 와서 보훈처의 서훈심사위가 어느 민간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훈 박탈을 의결하고 국무회의가 거수기처럼 이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이 정부는 한마디로 멍청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아니면 좌파적 아니냐고 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더욱 해괴한 것은 정보공개법 절차에 따라 보훈처 서훈심사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할 것을 요구한 조선일보의 요청에 보훈처가 "명단을 공개할 수 없다"는 공식답변을 보내온 것이다. 이 대명천지에 정부기관의 공적인 일을 하는 위원회의 명단을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니 이런 '막가파'식 정부가 어디에 또 있는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다. 이 정부는 한마디로 '철학이 없는' 정부 같다. 이 정권을 언필칭 보수정권이라고 하고 또 실제로 보수·우파 세력의 지지로 권력을 담임한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들을 보면 좋게 말해서 '실용'이고, 실제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기회주의적' 집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본질적 문제는 이 정부에 보수의 기본철학인 원칙과 가치에 대한 인식과 천착이 없다는 것이다. 인기가 있다 하면 좌파정책도 쫓아가고, 인기가 없다 하면 우파의 기본도 버리는 사례를 우리는 그동안 종종 보아왔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에 역행한 여운형과 주세죽(박헌영의 처)에 대한 훈장에는 손도 못 대면서 기왕에 준 장지연 선생의 훈장이나 도로 빼앗는 배알 없는 무개념 정권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얼핏 작은 사안인 것처럼 보이지만 장지연 선생의 서훈 박탈은 이 땅에 보수정치가 마감되고 있음을 예고한다. '멍청한 정부' 탓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대선배의 명예가 더럽혀졌지만 나는 그래도 장지연 상을 자랑으로 간직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