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김대중 칼럼]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도깨비-1 2011. 4. 5. 10:12


[김대중 칼럼]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국제 스포츠대회 유치부터 지방 신공항 건설까지
'세계적'에 집착하다 보니 모두가 싸움꾼 돼버려
모든 분야에서 1등 할 생각 버리고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김대중 고문/ 조선일보 2011. 04. 05

 

   한 외국인 친구가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듯 모를 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야. 이 작은 나라가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 세계 육상, F1 자동차 경주 등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를 안 한 것이 없으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시안게임도 인천까지 치면 3번이고,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까지 성공하면 인구·국토 대비 세계기록이 될 것이다. 그것도 25년 남짓한 기간에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나라가 하면 우리도 해야 하고, 다른 나라가 안 하거나 못 해도 우리는 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인 것 같다. 세계적인 박람회인 엑스포도 여수까지 두 번이고 우주선 나로호도 쏘아 올리려 하고 있다. 남극에도 기지를 만들고 세계 최고의 선박도 만든다. 자동차·전자제품은 물론 이제는 비행기(군용기)도 팔고 고속철도, 원자력발전소도 다른 나라에 수출하려는 단계에 와 있다.
   인구 4500만 규모의 나라에서 국제 항공사가 둘인 나라도 드물고 자동차 회사가 5개나 되는 나라도 없다. 공항도 인천국제공항을 포함, 적자인 지방공항까지 모두 15개나 된다. 신문도 100여 개가 되고 방송도 이렇게 많은 나라는 세계에 없다. 국제영화제도, 국제예술제도 여럿이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무엇 하나 '세계적'인 것을 붙들고 늘어지려니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차원에서도 그렇다. 대규모 토목공사 신드롬에 빠져 있다. 대운하, 4대강, 세종시, 혁신도시 등등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되는 대형 공사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분단된 땅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여㎞를 KTX로 2시간 반에 달려야 직성이 풀렸다. 마침내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로 지역이기주의가 충돌하고 중앙정부가 동네북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목공사뿐 아니라 경제운용 면에서도 남을 앞서간다는 '자랑'에 목을 매고 산다. 아마도 경제 규모가 우리나라 수준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FTA를 맺거나 맹렬한 협상을 벌이고 있는 나라는 우리뿐일 것이다. 국제회의도 남에 질세라 각종 회의를 유치하는 데 혈안이다. G-20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쓰러지는 줄 알고 있는 나라다. 부단히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랄까 조바심에 떨고 있는 사람들 같다. 여기에 했다 하면 또 1등을 해야 남들이 알아준다는 공명심도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금메달은 알아주지만 은메달, 동메달은 알아주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치중한다. 특히 우리나라 규모의 나라들은 그렇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은 특화된 산업에 치중한다. 스위스가 시계에 주력하고 북구에서 스웨덴만이 자동차(볼보)를 생산하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런 나라들이 기술이 없어서 자동차를 못 만들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거기까지 경쟁에 나설 필요가 없고 우주선은 강대국에 맡기고 자동차는 사서 쓰고 대신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뮌헨에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가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작용을 겪게 된다. 한마디로 너무 투쟁적으로 변해버렸다. 그러잖아도 원래 우리의 바탕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인 데다 만인(萬人)과 만인이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구조는 우리를 '싸움꾼'으로 몰아갔다. 조금 양보하면 지는 것이고, 지면 퇴출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오락·연예도 모두 '내가 너를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게임으로 변질됐다.
   이런 상황은 우리 모두를 모순된 이중구조로 몰아갔다. 1등을 갈망하면서 평준화를 주장하고, 개발을 앞세우면서 환경을 거론한다. 복지를 요구하면서 증세(增稅)는 반대(부자 증세는 OK)하고 외국산을 선호하면서 FTA는 반대한다. 자녀들은 미국에 유학 보내면서 반미(反美)를 외치고 다른 사람의 부정과 부조리에는 엄격하면서 자신의 비리는 변명한다. 그리고 싼 가격에 전기를 펑펑 쓰면서 원자력 발전을 비난하고 북한의 가난과 인권 유린에는 침묵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 상황을 규탄한다.
   이제 우리는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우리가 서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너무 투쟁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전 범위에 참여하고 모든 것에서 1등 할 생각을 버리고 우리 규모에 맞고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지혜를 터득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