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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칼럼] 金正日과 찍은 사진 감추게 되는 날

도깨비-1 2011. 3. 11. 14:37

[김창균 칼럼] 金正日과 찍은 사진 감추게 되는 날

 

80년대 신군부 왜 돕느냐며 미국에 분노했던 세력,
이제 金씨 왕조 손잡고 "北 民主 할 때 안 됐다"
카다피 친했던 이들처럼 言行 심판받는 때 올 것

 

 김창균 논설위원/ 2011년 3월 8일 조선일보

   1980년 6월 어느 날, 대학생 5~6명이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모였다. 젊은 사람 두세 명만 뭉쳐 다녀도 검문검색을 받던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놀이시설이 오히려 안전한 만남의 장소였다.
   3학년 리더가 누런 갱지에 등사한 인쇄물을 1학년 후배들에게 나눠줬다. '1980년 5월 한국 정국(政局)'에 대한 외신 기사를 번역해 놓은 내용이었다. 쉬쉬하며 귓속말로 전해 듣던 '광주의 비극'을 처음 문자로 접했다. 미 국무부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경고를 보냈다는 논평, "신(新)군부 정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코멘트를 읽으며 학생들은 위안을 느꼈다. 그 문건을 한동안 신줏단지 모시듯 숨겨놓고 꺼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에겐 저항공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댈 곳은 바깥세상뿐이었다. 미국이 신군부 쿠데타를 좌절시키지 않겠느냐는 '순진한' 생각을 품었던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기대와 달리 미국은 한반도 안정을 위해 전두환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 반미(反美)의 씨앗이 싹튼 순간이었다.
   그때 그 반미 세대들이 자라나 진보좌파 진영의 주축이 됐다. 그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김정일 왕조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북한 민주화를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30년 전 자신들이 듣고 분개했던 말을 이제 자신들의 입으로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민주주의 하기 이르다"는 말은 북한만 들었던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 역사가는 "일본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했고, 스위스 작가는 "민주주의 주사약이 있다고 해도, 세계를 힘으로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가진 독일 국민을 치료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도 1950년대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는 격"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사는 사람 눈에는 그렇지 않은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 할 능력이 없다고 보이는 모양이다. 불과 몇 십년 전인 자신의 '올챙이 시절'을 잊은 것이다. 진보좌파 진영은 "북한은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곧장 김일성 체제로 넘어갔다. 북한 주민에겐 민주나 인권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30년 전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 때문에 남쪽 체제를 못 견뎌 했으면서, 이제 북녘 형제들을 향해선 "당신들은 아직 갈증을 못 느낄 것"이라며 참고 지내란다. 남쪽 세상에서는 '진보(進步)' 명찰을 달고 살면서, 북쪽 세상을 향한 태도는 그들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즐겨 쓰는 표현 그대로 '수구(守舊)'다.
   지난해 탈북자 청년 앞에서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썼다가 "민족반역자를 어떻게 위원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라는 호통을 들은 적이 있다. 김씨들 밑에선 더 이상 못 살겠다며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넌 주민이 벌써 5만명이다. 그만한 용기가 없어 참고 살지만 마음은 매한가지인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탈북자들과 심정적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신음소리엔 귀를 막고, 독재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스스로를 '민주세력' '진보세력'이라 부르는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에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와 친분을 자랑해 왔던 글로벌 리더들이 가시방석에 앉은 신세가 됐다'는 글이 실렸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그 주인공들이다. 리비아투자청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 회장은 위원직을 내놨고, 카다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리비아 공무원 연수프로그램을 운영하던 런던정경대(LSE)는 강좌를 중단했다고 한다.
   진보좌파 사람들은 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을 훈장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사진 액자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날도 언젠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둬야 한다. 김정일의 식견에 감탄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김씨 체제를 돕는 것이 북한 주민을 돕는 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북한인권법안을 깔고 앉아 국회 통과를 방해했던 사람들은 또 누구였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