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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한국인은 5D를 이겼다"

도깨비-1 2010. 8. 31. 10:12


[특파원칼럼] "한국인은 5D를 이겼다"


 이항수 홍콩특파원/ 2010. 08. 31. 조선일보

 

 

   나는 조그만 강의실을 가득 메운 네팔인들에게 "아임 쏘리"를 연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한국말로 "괜찮아요. 사고로 죽지 않았어요"라고 위로했다. 지난 26일 오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남서쪽으로 300㎞쯤 떨어진 인구 10만의 지방도시 부트왈(Butwal)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 석달간 한국어를 배운 학생 500여명은 이미 28~29일 치러지는 '고용허가 한국어시험'(EPS-KLT)을 보려고 카트만두로 떠난 뒤였고, 마지막 버스 2대가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40여명의 학생에게 "왜 한국에 가려고 하느냐" "한국에 가본 사람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마야 초더리(Chaudhary·35)라는 여인이 "2004년부터 3년간 한국에서 일했고 이번에 붙으면 또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옆에 있던 친구들이 "초더리 남편은 한국에서 죽었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직감적으로 산업재해를 떠올린 나는 연거푸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남편은 밤에 기숙사에서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한국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아이 둘을 친정에 맡기고 남편까지 잃은 한국에 다시 가려는 것은 돈 때문이다.
   지난해 네팔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459달러(IMF 기준), 약 55만원이다. 반면 한국에 가면 시간당 최저임금 4100원에 하루 10시간씩 25일을 일한다고 가정할 때 매달 100만원 이상 벌 수 있다. 네팔 시골에서 20년 동안 벌 돈을 한국에선 1년 만에 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코리안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학원 운영자인 감비르 구룽(Gurung·43)씨다. 이 학원에서는 재작년 3월 700명이 한국어시험에 응시해 400명 이상 합격했다. 그들은 지금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인근 포카라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를 복수전공한 구룽씨는 2년간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1991년 부산에서 일할 기회를 잡았다. 이후 8년간 한국에서 일해 5만달러를 벌었다. 이 돈으로 고향 마을에 멋진 이름의 '퓨처 라이트(Future Light) 영어학교'도 세웠다. 이 사립 중학교 학생 360명에게 그는 매주 2시간씩 한국어를 직접 가르친다. 자신처럼 한국에서 돌아와 성공한 500명의 네팔인을 모아 '네팔·한국 개발위원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네팔의 한국 열풍은 아시아 일대에서도 최고다. 재작년 3월 첫 시험(EPS-KLT) 때 5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올해 두 번째 시험엔 10대1(4000명 모집에 4만2000명 응시)이 넘었다. 응시자 숫자가 가장 많고 경쟁률도 최고다. 이 관문을 통과한 합격자들은 이런 정신교육을 받고 있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3D 업종'에서 힘든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랍의 뜨거운 태양과 모래폭풍 속에서 5D, 10D의 어려움도 이겨낸 한국인 건설 노동자들의 강인함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 건강하게 한국을 속속들이 배우고 돌아와 네팔도 발전시켜 주십시오." 그 얘기를 들으며 1960~70년대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던 우리 광부와 간호사,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