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망국 100년, '선비 정신' 폄하 이제 그만
- 김병일/한국국학진흥원장/ 조선일보 2010. 09. 03
지난 5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수백 명이 한일병합은 일본이 날조한 불법조약이며, 따라서 원천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일병합은 순종이 서명을 끝내 거부하자 일제가 문서 자체를 날조하여 성사시킨 조약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왜 조약문서를 날조하는 편법까지 동원하였을까? 거기에는 왕실의 반대는 물론 재야(在野)에 있는 수많은 선비의 결연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순국한 매천 황현 선생, 병합이 되자 유서를 쓴 뒤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한 향산 이만도 선생, 종가(宗家)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로 무장투쟁 길에 나섰던 석주 이상룡 선생 등 많은 선비가 망국(亡國)의 한을 안고 기꺼이 목숨과 기득권을 버렸다. 탁상공론만 일삼다 속수무책으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비판받는 조선 선비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선비의 올곧은 행동 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공조참의를 지내고 낙향해 의병을 일으켰던 향산 이만도 선생이 순국하자 조카 이중언 선생도 단식에 들어가 27일 만에 순국하였고, 제자인 김도현 선생 또한 4년 뒤 동해에 몸을 던져 스승의 뒤를 따랐다. 뿐만 아니라 아들 이중업 선생 역시 뒷날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알린 1차 유림단 의거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며느리 김락 여사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실명(失明)하였으며, 손자 두 명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김락 여사의 형부가 석주 이상룡 선생이고, 친정 오빠가 환갑이 넘은 노구에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 김대락 선생임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행동 뒤에는 하나의 올곧은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선비정신이 그것이다. 일제는 병합 후 조선시대의 중추적인 선비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경학원이라는 관제기관으로 개편하여 총독부 학무국에 소속시키고 지방의 향교도 그 아래 두게 했다. 이는 명백히 조선의 선비정신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에도 선비정신을 폄하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안동 지역에서만 326명이라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선비정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제가 두 차례나 퇴계 종갓집을 불태워버린 것도 이 때문이다. 저들 눈에 퇴계 종택은 의병활동의 정신적인 온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근래 우리는 공동체의 위기를 걱정한다. 한 조사에서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겠다"는 우리나라 청소년의 비율이 10.2%로, 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낮을 뿐 아니라 일본의 4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정신적인 전통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그 희망의 싹을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수집·보관하고 있는 30만점의 국학자료 속에는 선비정신의 자취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다. 공동체를 우선하는 태도, 생명존중과 자연사랑, 정도(正道) 경영 등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들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지혜가 그 속에 가득하다. 맹자(孟子)는 "스스로를 우습게 여긴 뒤라야 남이 자기를 우습게 대한다"고 했다. 국권피탈 100주년을 맞아 진지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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