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아파트'가 쏟아진다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1]
정부·건설사, 수요분석 없이 "짓고 보자"
112개단지, 3년넘게 방치… 우범지대로
< 특별취재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도시들이 온통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 1995년 이후 15년간 전국에 지은 주택(728만채) 중 80%(560만채)가 아파트이다 보니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정부와 건설사들은 "국민들이 아파트만 유독 좋아해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파트는 무조건 팔린다는 '아파트 불패신화'는 이미 옛말이다.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공사가 중단돼 방치된 유령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달 30일 충남 천안시 목천읍에 있는 A아파트를 바라보던 주민 김모(52)씨가 혀를 찼다. "해 질 녘만 되면 애들이 슬금슬금 저기로 기어올라간단 말이야. 동네에선 저 썩어 가는 아파트가 완전히 애물단지야."
3개 동(棟)으로 된 이 건물은 회색빛 외관의 골조(骨組)만 덩그렇게 올라간 채 공사가 중단된 '유령 아파트'다. 건물 사이 빈 공간엔 사람 키높이는 됨직한 잡풀이 무성했다. 폐허가 된 내부에는 썩은 물이 고여 악취가 진동했다. 깨진 유리창과 뜯겨 나간 창틀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거리에도 작년에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공사장이 방치돼 있다. 펜스막 뒤로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3~7층까지 올라가 있지만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공사장을 오가는 차량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B건설사가 1300여 가구 규모로 지하 2층, 지상 35층짜리 10개 동을 지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약자가 없어 결국 지난해 하반기 공사 도중 사업을 중단했다. 주민들은 "공사중단으로 우범지대로 변하고 있다"면서 "주변에 논바닥밖에 없는 곳에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한 건설사들의 발상이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이처럼 공사를 하다가 3년 이상 방치된 유령 아파트는 전국적으로 112개 단지에 달한다. 연면적으로 치면 여의도(850만㎡)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354만㎡나 된다.
완공은 됐지만 주인을 찾지 못해 빈집으로 남아 있는 아파트도 전국적으로 5만 가구가 넘는다. 대구(8662가구), 부산(5186), 광주광역시(4930), 원주(2132)뿐만 아니라 경기도(2121)에도 빈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공사 중인 미분양 아파트까지 합치면 13만 가구 수준. 최근 조금 줄고 있지만, 3만 가구 수준이던 2001~2003년과 비교하기조차 힘들다. 대구에만 2만 가구가 넘는 미분양 아파트가 몰려 있다. 미분양 급증으로 인해 자금난을 겪는 건설사들의 부도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짓기만 하면 무조건 돈이 된다'는 '아파트 불패 신화'만 믿고 건설사들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파트를 짓다 자초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아파트가 돈이 되기는커녕 대량 미분양으로 건설사들의 연쇄부도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미분양 아파트에 잠긴 돈만 가구당 1억원으로 계산해도 13조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건국(建國) 이후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처음 선보인 건 1958년. 서울 종암동에 지은 5층짜리 '종암아파트'가 효시다. 당시 "서울에 명물이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아파트는 희귀했다. 당시 부족한 주택을 대량공급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었던 측면도 있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아파트의 확산으로 1970년 78% 수준이던 주택보급률이 지난해 100%를 처음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남아도는 지역에서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아파트가 지역 개발의 상징이고 세금을 더 걷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아파트 인허가를 남발하고 있다. 정부도 주택공급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주택공사(현 LH공사)를 동원해 주택이 남아도는 지방까지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인들로부터는 특색 없는 도시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한국 생활 10년이 넘은 영국인 존 세이가(38)씨는 "서울에 오는 외국인이 첫눈에 가장 놀라는 건 도시 전체를 뒤덮은 아파트"라며 "땅값 싸고 사람도 별로 없는 농촌까지 아파트가 있다는 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새집 지으려다 법정 설라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재건축·재개발 소송, 작년 한 해만 2265건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 중인 많은 지역에서 개발 진행 방식과 절차를 놓고 이해 관계가 엇갈린 주민 간 소송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재개발·재건축 관련 소송(민사소송 1심)은 2004년 741건에 불과했지만 2008년 2265건으로 4년 사이 3배나 급증했다.
서울 마포구의 한 뉴타운 지역에서는 올 들어 조합원의 동·호수 추첨과 착공을 앞두고 사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조합원들이 임시총회를 열어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된 조합장을 해임했기 때문이다. 마포의 또 다른 뉴타운 지역에서는 대의원들이 '회계감사 내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조합을 고소하기도 했고, 동작구의 재개발 사업장에서는 조합설립 인가와 재개발구역 지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이런 이유로 4~5년이면 끝날 재개발 사업이 수년씩 지연되기 일쑤다. 대형 건설사의 한 주택영업본부장은 "재개발 지역 중에 소송이 한 건이라도 걸려 있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며 "공사기간은 2~3년이면 충분하지만 주민 갈등과 각종 소송으로 10년을 넘기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낡은 주택 고쳐 세계적 관광지로… 불도저식 재개발 끝내야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3·끝] 대안을 찾아서
아파트 아닌 주택으로도
관광객 끌고 전통 보존…
'똑똑한' 리모델링 필요
일본 교토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인 니넨자카, 산넨자카. 깜짝 놀랄 만한 화려한 유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볼품없어 보일 수 있는 옛 가옥들이 몰려 있는 좁은 골목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낡은 전통 주택들에 자리 잡은 기념품 가게, 카페, 우동집을 거닐며 가장 일본적인 문화를 만끽할 수 있어 일본인들도 꼭 찾고 싶어하는 관광지이다.
그리스 산토리니와 이탈리아 카프리섬이 신혼부부들이 찾고 싶은 1순위 관광지가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전통주택 덕분이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산등성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낮은 주택들이 빚어내는 색다른 풍경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매력 덩어리이다. 이런 주택들이 그냥 보존된 것은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발업체들이 아파트를 지으려고 했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이 막아 낸 것이다. 자치단체들이 건물의 색깔과 창문의 크기, 건물 높이까지 규제한다. 그 지역의 독특한 건물이 빚어내는 풍광이 천혜의 자연환경 못지않은 경쟁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디자인 도시를 만들겠다며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아파트로 도시경관을 망치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시들도 아파트로 도시의 특색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엑스포를 계기로 세계적인 관광도시를 목표로 하는 여수. 해안가와 여수 해양공원과 맞붙어 있는 고소동 산 중턱에는 20층 높이의 아파트(5개 동)가 우뚝 솟아 있다. 관광객들은 유람선을 타고 경치 좋은 여수 앞바다를 구경하다가도 이 아파트만 보면 "어떻게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느냐"며 한마디씩 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한번 지은 아파트는 허물 수도 없는 만큼, 더 늦기 전에 아파트 일색의 건축문화를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불도저식에서 수복형 재개발로
우리 도시경관이 획일화된 것은 수천·수만 가구의 주택을 일시에 싹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는 데 있다. 외국에서도 1940~1960년대에 철거형 재개발(slum clearance)이 유행했지만, 지역 공동체 파괴, 일시적 철거에 의한 주택난 등 부작용 때문에 없어졌다. 대안으로 자리 잡은 것이 기존 건물들을 리모델링하거나 부분적으로 건물을 헐어내는 수복형 재개발이다.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영국의 금융중심지로 재도약한 런던의 도클랜드. 이곳에는 유럽 최고층 빌딩인 '카나리워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항만지역이었던 지역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붉은 벽돌로 쌓은 기존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해 주거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템스 강변에 자리 잡은 영국 런던 버틀러 워프는 1980년대만 해도 슬럼화된 낡은 건물들이었다. 낡은 건물을 철거한 게 아니라 리모델링을 통해 고급주택과 상가시설로 복원해 런던의 새로운 명물이 됐다.
독일 함부르크의 옛 항만지역인 하펜시티는 대대적인 재개발을 하면서 기존 부두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콘서트홀과 국제해양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최민섭 서울벤처정보대학원 교수는 "디자인 서울을 만든다면서 수천억원을 투자하고 있지만 특색 있는 골목과 거리를 망가트리고 있다"면서 "획일적인 재개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적 개발 방식으로 경제활성화
지금 한국은 아파트 재개발이 수도권은 물론 지방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기존의 도심 주택들을 헐어내고 아파트를 짓는 방식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문화를 활용한 재개발 사업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있다. 영국 게이츠헤드라는 도시는 이 지역을 지탱하던 중화학 공업이 쇠퇴하자 예술을 지역경제 활성화 전략으로 채택했다. '북녘의 천사(The Angel of the North)'라는 대형 조각물, 사람과 자전거만 다니는 독특한 디자인의 밀레니엄 브리지, 제분소를 개조한 미술관 등 기존 건물들을 철거한 것이 아니라 활용했다. 기존의 낡은 주택들을 리모델링해 예술가들에게 저렴하게 임대해줬다. 예술의 도시로 알려지면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했다. 쇼핑과 패션의 중심지로 유명한 뉴욕 소호도 한국식 재개발을 했다면 지금의 명성은 없었을 것이다. 소호는 가내수공업 공장들로 쓰이던 로프트(loft)라는 건물이 밀집된 낙후지역이었다. 미술가들이 로프트가 천장이 높아 스튜디오로 쓰기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입주하면서 주변에 화랑과 카페 등이 생기면서 고급 상가와 주거지로 발전했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지금 아파트만 잔뜩 지었다가 팔리지 않아 빈집으로 남아 있는 지방도시가 많다"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아파트보다는 예술 등 다양하게 주거계획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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