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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의 절명시와 경남일보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33]/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0. 22. 12:14

황현의 절명시와 경남일보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33] 1909. 8. 29~1910. 8. 29

 

          정진석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정보학

 

   한일 강제합병 소식을 전남 구례(전북 남원)에서 들은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2.11.~1910.9.10.)은 칠언절구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장지연(張志淵)은 황현의 이 '절명시'를 '경남일보'(1910.10.11.)에 실으면서 '매천이 남긴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떨어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줄도 몰랐다'며 통분의 심정을 덧붙였다. 총독부는 경남일보에 정간을 명하여 신문이 10일간 발행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경남일보는 한 해 전인 1909년 10월 15일 진주에서 창간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한 처음이면서 유일한 지방신문이었다. 오늘이 그 창간 100주년이다.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1896.4.7. 창간) 이후 서울에는 해가 갈수록 여러 신문이 새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였으나, 지방에서 발행된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19세기 말부터 부산·인천·평양 등 여러 지방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경남일보는 뜻을 같이하는 진주 지방 유지들의 주식 모금으로 설립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경남일보의 창간을 축하하는 논설에서 '한국 13개 도에 웅주(雄州) 거읍(巨邑)이 한둘이 아니로되 처음으로 지방신문이 나왔으니 기쁘면서도 안타깝다'고 했다.
   '오호라, 경남일보여 분발하며 진보하여 인민의 행복과 이익을 장려하며 국가의 문명과 부강을 도와서 그 책임을 쾌히 담임할지어다. 우리는 붓을 잡고 그대의 전도를 축원하노라.'('신보', 11.26.)
   경남일보가 주목받은 것은 주필 장지연(사진·앞줄 왼쪽·1906년 휘문의숙장 시절 모습. 그의 옆은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 유근(柳瑾))의 명성에 힘입은 바도 컸다. 장지연은 황성신문 사장 재직 시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황성신문, 1905.11.20.)을 썼던 기개 있는 논객이었다. 일본 헌병대는 당장 장지연을 투옥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 이듬해 황성신문의 정간은 해제되었지만 장지연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해조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으나 그곳에서도 뜻을 펴기 어려워지자 귀국하여 경남일보 주필 직을 맡은 것이다.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 황현은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절망적 상황에서 목숨을 버렸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서 피를 토하며 쓴 절명시는 진주에 홀로 남은 한국어 신문 경남일보의 한 귀퉁이에 실렸으나 100년이 흐른 후에도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장지연과 황현의 우국충정은 진주와 남원이라는 거리를 뛰어넘고 죽음과 삶을 초월하여 상통했던 것이다.
   경남일보는 강제합병 후에도 당분간 명맥을 이어가다가 1914년 말 끝내 폐간되었다. ▣

 

전남 구례  -  조선일보 신문 기사(종이신문 및 아이리더 10월 15일자 오피니언 페이지-"100년전 우리는" )에는 "전북 남원"으로 기사화 되었으나   인터넷판 조선닷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4/2009101401836.html?srchCol=news&srchUrl=news1)에는 "전남 구례"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