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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 (펌)

도깨비-1 2009. 10. 22. 11:47

2010년이 되면 애국지사 황현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 됩니다.

 

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

경향신문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않는다면 되겠는가”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다던 곳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石沙里)의 서석(西石)마을은 지리산 줄기의 문덕봉(文德峯) 아래에 자리잡은 아늑한 마을이다. 그곳은 예전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전설을 사실로 증명해 줄 때가 왔으니, 1855년 음력 12월11일 그 마을에서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의 탄생이 바로 그 때였다.

 

황현은 조선왕조 최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며,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때를 맞아 선비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말았던 탁월한 애국지사였다.

 

산과 들에 봄꽃이 가득하고 온갖 수목에 새잎이 돋아나 천지가 가장 아름다운 봄날, 봄의 햇살을 가득 안으며 우리 일행은 매천 황현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섬진강의 굽이굽이에 은어가 뛰놀고, 한창 참게가 커가며 미식가들에게 구미를 돋우는 4월의 하순, 강변의 꽃길을 돌고 돌아 석사리의 서석마을, 초가지붕으로 새롭게 단장해 복원된 매천의 생가에 이른 때는 오전 10시가 다되어 찬란하게 햇살이 비추던 시각이었다.

 

필자는 20년 전인 겨울에 최초로 그곳을 찾았었는데, 그때는 매천이 태어난 안채는 없어지고 사랑채 한 칸이 겨우 남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최근에 시청에서 제대로 복원하여 덩실한 매천의 생가가 우람하게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기분이 좋은가. 더구나 초가집의 원형대로 다시 세웠으니 더욱 보기에도 좋았다.

 

‘매천황현선생 생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주련까지 새겨 걸어서 운치가 더욱 빛났다. 기분이 좋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부터 골목마다에 간판을 세워 매천의 생가를 자세히 가리켜주어 찾아가기도 쉬웠으니, 잘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일은 그런 데서도 돋보이기만 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의 황씨 선산 매천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도, 곳곳에 안내 푯말을 세워 찾기가 쉽기만 했으니 얼마나 친절한 행정인가.

 

매천이 누구인가

 

 

 

 

 

뛰어난 시인이던 매천은 당대의 훌륭한 역사가였다.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은 매천의 높은 사안(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 세사의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 저술인데, 그 역사책에는 황현 자신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어 간단하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대한(大韓)은 망하고 전 진사(進士)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죽다. 현의 자는 운경(雲卿), 그의 선대는 장수인(長水人)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인공 진(進)의 후손으로 호가 매천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며 노사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자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주었다. 어른이 되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과 좋은 벗으로 사귀었다. 34세 때인 고종황제 무자(戊子·1888)년에 진사가 되었다. 담론을 잘하고 기절(奇節)을 좋아했으나, 세상이 잘되어갈 수 없음을 알고서 고향집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자기의 뜻을 맡겨 훌륭한 작품을 지어냈으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융희 4년 8월3일 합병령을 군청에서 마을까지 반포하자 그날 밤에 아편을 마시고 다음 날에 목숨이 끊어졌다. 유시(遺詩) 4수를 남겼다”

라는 이 처절한 기록이 ‘매천야록’의 맨 끝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유시 4수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매천은 세종 때의 명정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이름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의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황현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처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선비정신은 제대로 살리기만 하면 그렇게 멋있구나 하는 본질을 보여준 자결이 바로 매천의 죽음이었다.

 

그의 짤막한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

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해준다.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룸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시에서 같은 뜻을 밝히고 있다.

큰 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쪽의 공도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止竟僅能進尹穀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當時愧不陳東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이루려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였다.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秋燈掩卷懷千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難作人間識字人

 

이 절명시는 글자나 아는 사람, 즉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통절히 읊어준 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역사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왜 죽을 이유가 있겠는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어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롭고 아프다는 내용이 가슴을 떨리게 해주고 있다.

 

4대의 무덤이 있는 매천의 묘소

 

매천의 절명시(絶命詩)를 읊으며 생가를 등지고 마을 뒷산 아래의 황씨의 선산을 찾았다. 매천의 선대는 본디 남원에서 세거하였다. 매천의 할아버지 직()이라는 분이 광양으로 내려와 석사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가세를 일으켰는데, 선산의 맨 위에 있는 무덤이 바로 할아버지의 묘소였다. 그 묘소 아래 오른쪽의 묘소가 매천의 아버지 황시묵(黃時默)의 묘소이고 왼쪽이 ‘애국지사 황현의 묘’라는 초라한 비가 서있는 매천의 묘소다. 아버지 묘소에서 더 아래쪽 오른편의 묘소가 매천의 큰아들 황암현(黃巖顯)의 묘소였다. 이렇게 4대의 묘소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문중의 제각(祭閣)이 서있었다.

 

위인의 묘소라서 반드시 웅장하고 근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국지사라는 빗돌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매천의 묘소는 정말로 초라했다. 내년이면 거기 묻힌 지 100년째, 그 다음해인 2010년이면 매천 서세 100주년이 된다. 그런 무서운 의혼과 시심이 묻혀 있는 무덤이 꼭 그렇게 보잘 것 없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생가를 볼품 있게 복원하여 의젓하게 보여주는 정신으로 묘소에 대한 무엇인가가 거론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에 자결한 의인 중의 최고 문학가

 

망국 무렵의 큰학자 박문호(朴文鎬)는 ‘매천황공묘표’라는 이름의 매천의 일대기를 담담한 표현으로 서술하였다. 평생토록 매천과 가장 친했던 동지이자 문우였던 창강 김택영은 ‘본전(本傳)’이라는 이름으로 매천의 역사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 글의 끝부분에서 창강은 당시 나라가 망하자 의분에 못 이겨 자결한 당대의 의인을 모두 열거하였다. 조선에 선비의 혼이 살아있고, 애국심을 지닌 투철한 의혼의 인물이 즐비했음을 알리는 뜻이기도 했다.

 

금산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 참판 장태수, 정언(正言) 정재진, 승지 이재윤,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무인 전주의 정동식, 유생 연산 이학순, 전의 오강표, 홍주 이근주, 태인 김영상, 공주 조장하환관 반씨 성을 가진 사람 등 15인을 열거하고는 그중에서 매천이 문학가로서는 가장 저명했던 분이라고 했다.

 

이런 의인들에 대하여 역사는 너무 무정하다. 홍범식 · 이만도 · 김석진 · 황현 등은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이름이 전하지만 대부분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결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500년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유교 국가였는데, 겨우 그만한 분들만이 망국에 즈음하여 목숨을 끊었던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만한 의인들이 그렇게 역사에 묻히고 마는 일은 더욱 서럽다. 탁월한 시인, 희대의 애국자가 묻혀 있는 쓸쓸한 묘소를 떠나오며 동행했던 순천대 조원래 교수도 그 점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광양에서 구례로

 

매천 황현은 29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시골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내려지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하향하여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광양의 석사리를 떠나 이웃고을인 구례로 옮겨 살았다. 지리산의 지맥인 백운산 아래 만수동(萬壽洞)이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은 구례군 간전면 효동 양천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싸리문을 굳게 닫고 출세는 포기하고, 숨어살면서 학문에 전념키로 했었다.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서재를 짓고 연구와 강학에 열중하면서 기울어가는 나라 걱정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나 부모님의 간절한 요구를 저버리지 못해, 다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다. 34세인 고종 25년 마침내 생원시장원하여 진사(進士)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연이어지고 탐관오리들이 세상을 농락하던 시절, 나라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자, 마침내 모든 희망을 접고 구례로 낙향하고 말았다. 학문을 닦고 학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모든 정력을 바쳤다. 1898년 평생의 동지이자 문우였던 이건창이 세상을 떠나자 600리 먼 길을 걸어서 강화도의 이건창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의리를 지켰다.

 

다시 월곡(月谷)으로 옮기다

 

만수동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월곡으로 이사하여 영주할 뜻을 굳혔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라는 마을이다. 1905년 51세의 매천은 을사늑약의 비통한 현실을 당하자, ‘문변3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서러움과 울분을 토하고,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매국노를 성토하고 애국지사들을 애도하였다.

을사년 10월 변란(을사늑약)에 조병세(趙秉世) 정승 등 3공(조병세 · 민영환 · 홍만식)이 자결하였다. 내가 그 소식을 듣고 사모의 정을 느껴 두보(杜甫)의 8애시를 모방하여 시를 지었다

라고 설명하고 세 분 이외에 면암 최익현과 영재 이건창 두 분을 포함하고는, 아직 살아는 있으나 앞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예상하여 최익현은 포함시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이건창은 현재에 인물이 없어 추모의 뜻으로 그분을 넣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5애시’만 보아도 그가 벌써부터 자결의 뜻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에 면암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패전하고 몸은 대마도에 구속되었고, 끝내는 단식으로 왜와 싸우다가 순절하였으니, 매천은 이미 최익현의 죽음까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무렵 평생 동지이자 문우였던 창강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계책을 세우자, 이건창도 없이 혼자 고향에 칩거하던 매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고 어떻게 해야 선비로서의 마지막을 제대로 정리할까 궁리하면서 우울한 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효효병()에 뜻을 의탁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유교정신으로 다듬어진 선비로서,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한 을사늑약 이후의 대한제국, 나라는 망했다고 여기면서 삶을 마무리할 생각에 골똘하였다.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인물들을 찾아내, 그들이 살았던 길을 걸으며 선비의 도를 지킬 것만 마음에 두었다. 난세에 몸을 깨끗이 하고 의인의 지조를 지켰던 중국역사상 10명을 찾아냈으니 다름 아닌 매복(梅福) · 관영(管寧) · 도잠(陶潛) · 고염무(顧炎武) 등이었다. 그들의 행적과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마다 시를 한수씩 지어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거실에 비치해두었다. 병풍의 이름을 ‘효효병’이라 짓고, 제자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의 글씨와 그림으로 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지니 보물로서의 가치도 높다.

 

매천사(梅泉祠)를 찾아서

 

구례의 4월은 영산홍의 계절이다. 매천의 영혼을 모시고 그의 고매한 충절을 기리는 사당, 매천사를 찾아가는 길은 앞뒤 좌우가 모두 꽃으로 덮여 있었다. 하필이면 이 시절에 논에는 그렇게도 자운영꽃이 만발했는지. 모처럼 구경하는 자운영 논에서 옛날의 추억이 새로웠다. 광의면 수월리, 월곡이라는 마을은 매천이 48세에서 56세까지 생애를 정리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20년 전에 찾아왔을 때에도 초옥의 허름한 사랑채가 남아있었다. 그 사랑채의 왼쪽 방이 매천이 거처하던 서실로, 바로 그곳이 매천이 운명했던 방이었다.

 

이제 옛날의 상랑채는 허물어 없어지고 새로 덩실하게 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다만 터가 좁아 4칸이던 집은 3칸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니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절명시 4수를 짓고, 유서를 쓰고, 아편을 먹고 운명했던 그 방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음은 너무도 마음 아팠다. 그러나 ‘매천사’라는 현판을 달고 단청도 찬란하고 의젓하게 서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매천황현선생신위’라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천의 영정이 당대 화가 채용신의 솜씨로 그려져, 그대로 보관되어 있으니 매천의 매서운 눈빛과 얼굴 모습에 경배를 올리면서 마음이 으슥해졌다. 매천사 경내를 둘러보니 그런 대로 매천의 혼과 뜻이 느껴졌다. 매화가 꽃은 졌으나 잎이 파래서 매천의 혼이 느껴졌고, 동백이나 소나무 등 곧고 바른 뜻의 수목이 고르게 배치된 것도 매천의 정서를 느끼게 했다.

 

 

시대를 통찰했던 지식인

 

매천의 막역한 지기이고 특출한 시인이자 문인이며 역사가였던 김택영은 매천의 본전(本傳)에서 이렇게 썼다.

… 기개가 오올하여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교만하거나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무리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면박하였으니, 당시에 세도를 부리던 권력층들은 매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대하면 따뜻한 봄날처럼 화기롭게 담소하였다. 마음이 맞는 친구 중에서 멀리 귀양을 가거나 상을 당하는 경우에는 백리나 천리의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달려가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봐주며 조문하였다. 평소에 글을 읽다가 충신이나 의사(義士)들이 곤경에 처하여 액운과 싸우던 원통한 대목을 보면 그만 철철 눈물을 흘렸다”

라고 적고 있다.

 

불의와 악에는 철저한 미움을 토로하면서도 옳고 바른 일에는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았던 매천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그의 정신과 삶의 태도가 그로 하여금 목숨을 끊는 무서운 용기를 갖게 하였으리라. 인간됨의 깊은 뿌리가 없고서는 창조적 역사행위를 실천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거세고 억센 목소리와 행동 뒤에는 잔잔하고 따뜻한 인간의 숨결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남의 딱한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바꾸어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이 뿌리하고 있는 인간만이 옳은 행동을 해낸다. 매천의 의혼은 그런 바탕에서 생성되었을 것이다.

 

매천은 그의 인간적 한계나 시대적 한계를 모두 벗어난 진보적 학자는 아니었다. 봉건적 유학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당시의 일반적 유자들이 매몰되었던 성리학 위주의 고루한 학자는 아니었다. 가슴에 타고 있던 충의의 정신을 버리지 않고 의분심에 치떨던 용기를 잃지도 않았지만, 의분심과 충의의 마음으로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창강이 기술한 그의 학문 태도를 보자. 

 

“학문하는 태도는 글을 읽어 그 진의에 통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세속에서 흔히 보던 고루한 형식의 강의나 강학하는 사람들과는 교류하기도 즐기지 않았다. 역대의 역사책으로 치란흥망의 자취에 마음을 기울였고, 병형(兵刑) · 전곡(錢穀)의 제도에 관한 것과 새로운 서양의 신문화에서 들어온 민생과 이용후생의 방법까지도 항상 유의하여 나라의 가난을 구제해보려고 애썼다…”

라고 했던 대로,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어 본 매천은 구태의연한 학문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의 흡수와 전수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한없는 흠모의 정을 보내며 그의 학문적 업적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나라를 건지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려는 그의 강한 의지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1908년 신식 사립학교를 건립하여 신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음은 그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호양학교(壺陽學校)

 

방호산(方壺山) 남쪽의 학교여서 호양학교라고 이름 지어 학동들을 가르쳤으니, 시대를 인식했던 그의 뜻은 높기만 했다. ‘매천야록’이란 역사서와, ‘오하기문’이라는 매천의 역사비평서는 매천의 역사의식 및 그의 뛰어난 비판정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저서다. 천재 시인이던 매천, ‘매천시집’이나 ‘매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문에 나타난 문학정신이나 경세논리는 그가 조선의 마지막 최고 시인임은 물론 탁월한 역사가이고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았던 큰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이라는 세 지기지우들이 망해가던 무렵의 조선에 있었기에 그래도 세상은 덜 쓸쓸했다. 전통과 고전에 높은 식견을 지녔고, 변화하는 시대와 역사에 눈을 뜬 그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단절은 오지 않았다. 매천사를 뒤로 하고 구례를 떠나오던 우리의 가슴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왜 오늘의 지식인들은 고전과 전통에 그렇게도 약한 것인지. 그러니 어떻게 높은 수준의 역사 창조가 가능하단 말인가.

 


 

황현(黃玹, 1855∼1910)

 

한말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그의 글이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여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은 채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하였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하여 3,000여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짓기와 역사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하여 《매천야록 梅泉野錄》·《오하기문 梧下記聞》을 지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해놓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하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 東匪紀略》 등이 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

 

亂離滾到白頭年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幾合捐生却未然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짐에

九闕沈沈晝漏遲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부터 조칙(詔勅)을 받을 길이 없음에

琳琅一紙淚千絲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鳥獸哀鳴海岳頻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槿化世界已沈淪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會無支廈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止竟僅能追尹穀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當時愧不躡陳東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육군부장 시종무관장(陸軍副將 侍從武官長)의 현직에 있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비분강개하여 통곡하며 11월 30일,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고종과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遺書)를 남기고 할복 자결을 결행하였다.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잔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은 천만배로 보답하여 마음을 굳게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 제국 2천만 동포형제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순국하고 8개월이 지난 이듬 해 봄 그 자리에서 청죽(竹)이 솟아 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血竹)이라 불렀다 한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민영환의 비장한 순국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칼이 워낙 작아서 한번 찔러 뜻을 이루지 못하자 피가 칼자루에 묻어 잘 쥐어지지 않으므로 벽에 닦고 또 닦고 하여 남은 흔적이 있었다.”

 

血竹(혈죽) - 黃玹(황현)

 

竹根於空不根土 대나무가 흙 아닌 공중에 뿌리 내렸네

認是忠義根天故 이 충정 이 의리를 알아, 하늘에 내린 것이네

 

山河改色夷虜瞠 산도 물도 놀라고 오랑캐도 놀랐네

聖人聞之淚如雨 임금님도 소식 듣고 흐르는 눈물 비 오듯 했다네

 

四叢九幹綠參差 네 떨기 아홉 줄기 푸른 잎이 들죽날죽

三十三葉何猗猗 서른 셋 댓잎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衣香未沫刀不銹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칼은 녹슬지 않았네

怳復重見含刃時 칼날 입에 물고 있을 때를 멍하니 다시 보는 듯

 

刎頸報國古多有 목 찔러 보국하는 일 옛날에도 있었지만

亦有烈烈如公否 그 열렬함이 공 같은 이 또 있을까

 

全身義憤刺不痛 의분에 끓는 몸이라 찔러도 아프지 않아

一連三割如鉅杇 연달아 세 번, 흙손질하듯 할복하셨네

 

精靈所化現再來 공의 정령 변하여서 대나무로 다시 오심에

驚天動地何奇哉 천지가 놀람이 어찌 이상할까

 

晝哭聲斷素屛捲 통곡 소리 그치고, 흰 병풍 걷어내니

蛛絲旖旎塵爲苔 거미줄 훨훨 날리고, 먼지가 쌓였구나

 

靑蔥扶疎森似束 푸른 잎이 줄기에 붙은 것이 떨기를 이루어

百回拂眼看是竹 눈 부비며 백번을 다시 보아도 대나무가 분명하다

 

殘春窅?解錦繃 늦은 봄 깊숙한 곳, 비단포대기 같은 죽순 열리어

一氣凄凜搖寒玉 싸늘한 한 기운, 차가운 대나무 흔들어보네

 

分明碧血噴未乾 분명한 푸른 피, 치솟아 마르지 않고

點點灑作靑琅玕 점점이 뿌려져서, 대나무로 되었구다

 

爲厲殺賊帳睢陽 죽어서도 칼 갈아, 적 죽이는 장휴양이 되고

復生剿胡文文山 다시 살아, 오랑캐 치는 문문산이 되시옵소서

 

空然化竹不濟事 공연히 대나무 되어 일을 성사 못하시면

此恨空留天地間 이 원한 천지간에 헛되이 남으리라

 

 

출처 : 죽산안씨(신) 종친회
글쓴이 : 안재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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