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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한말 유학자) [崔益鉉]

도깨비-1 2009. 10. 22. 11:43
최익현 (한말 유학자)  [崔益鉉]
 
1833(순조 33). 12. 5 경기 포천~1906(광무 10). 12. 30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
한말의 유학자·애국지사.
 
최익현
 
최익현 /최익현이 새긴 지장암, 전라남도 ...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곡(直谷)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썼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鞫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위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풀려나 향리로 내려갔다. 이어 고종에 의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회유하여 해산시키기 위한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1900년 거주지를 충청도 정산으로 옮긴 후 홍천·지평·제천·안동·경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친척과 벗들을 방문하고 강회(講會)를 여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2월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8월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상경하여 자문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의 벼슬을 내렸다.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민비학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의 반일상소가 잇따르자 그해 3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포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며칠 후 다시 상경하여 상소문을 작성했으나 재차 강제 송환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戮)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結稅) 상납을 거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軍器)·총포(銃砲)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