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클릭! chosun.com]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1> 성채와 궁전에 사는 한국인

도깨비-1 2009. 9. 14. 11:15

입력 : 2009.09.13 21:26 / 수정 : 2009.09.14 11:07    

  • 김어진 기자 hanme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편집자 주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1> 성채(castle)와 궁전(palace)에 사는 한국인


    “한국 학생들은 전부 엄청난 부자인 줄 알았어요. 다들 집이 성(castle) 아니면 궁전(palace)이더라구요.”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7년째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 잭슨(40·가명)씨는 한국에 처음 와서 학생들이 어디 사는지 물었다가 깜짝 놀랐다. 트라팰리스(tra-palace), 롯데 캐슬(castle), 로얄 카운티(royal county) 등 하나같이 부유하고 고급스런 뜻의 외국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성과 궁전이 너무 여러 곳이라서 물어보니까 아파트 상표였다”며 “얼마 후 사귀게 된 한국인 여자 친구는 자이(Xi)에 산다기에 속으로 좀 실망했는데 거기도 비싼 아파트였다”고 털어놓았다.

    외국어 남용이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는 가운데 아파트 이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전체 인구 가운데 아파트 거주 비율이 43.9%로 단독주택의 42.9%를 넘어선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부동산정보회사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9월 첫째주 전국에서 일반 분양된 아파트 7개 단지 2907가구 중 1개 단지 400여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어 이름이었다. 이들은 각각 ‘힐스테이트’, ‘I PARK’, ‘웰카운티’, ‘휴먼시아’, ‘인스빌리베라’ 등이다.

    이러한 아파트 명칭의 외국어화 경향은 2000년대 들어 심화됐다. 2000년 초 ’래미안(來美安)‘으로 ’브랜드 아파트‘ 시대를 연 삼성이 이어 건설한 고급 아파트에 ’타워팰리스‘와 ’트라팰리스‘ 등의 영어 이름을 사용하면서 대림의 ‘아크로비스타’, 금호의 ‘리첸시아(Richensia)’, 롯데의 ‘캐슬’ 등이 등장한 것이다. 이미 2000년대 중반 새 아파트의 47.8%가 외국어로만 조합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90년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붙였던 ‘은하수 마을’, ‘샛별 단지’ 등은 더 이상 인기가 없었다.

    문제는 외국어로 된 아파트 명칭 가운데 설명을 듣지 않으면 뜻을 알 수 없는 ‘암호’도 많다는 것이다. 배우 이영애가 선전해 유명해진 ‘자이(Xi)’는 ‘extra(특별한)+intelligent(지적인)’란 약어이고, 금호의 ‘리첸시아’는 ‘Rich(부유한)+Intelligentia(지식인을 뜻하는 러시아어)’을 합친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경우도 많아서 청담동의 ‘이니그마빌’은 실제로 ‘Enigma(수수께끼)+Village(마을)’의 합성이고, 포스코건설의 ‘더샾(Sharp,#)’은 ’내 삶의 반올림‘이라는 광고 문구까지 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모 영문명 아파트에 사는 최모(29)씨는 “이사 후 처음 찾아오신 할아버지·할머니께서 ‘네 부모가 노인네들 못 찾아오게 하려고 이름 어려운 집으로 이사한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셔서 한참을 웃었다”고 말했다. 반포 자이 아파트의 이모(21)씨도 “집에 놀러 온 일본인 친구가 아파트 이름 뜻을 물어서 그제야 인터넷을 찾아 보고 알게 됐다”고 했다.

    한편 이러한 아파트 명칭의 외국어 남용은 계층간 위화감을 심화할 우려도 있다. 비싼 아파트일 수록 외국어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상반기 동안 매매된 아파트 가격이 높은 순으로 100개를 꼽으면 74개가 외국어 이름이었다. 이 중 우리말로 된 고가(高價) 아파트는 2000년 이전에 지은 강남구 압구정동의 미성, 한양, 현대 아파트와 동부이촌동의 대림 아파트 정도였다.

    반면 임대 아파트는 대부분 우리말 이름이거나 외국어와 혼용된 경우가 많았다. 지난 9월 첫째 주 일반 분양된 아파트 중 유일하게 영어 이름이 아니었던 곳도 지방의 임대 아파트였다. 한창 외국어 명칭의 아파트가 등장하던 2001년에도 독자적인 임대 아파트 단지 17개 가운데 12개가 우리말로만 되거나 우리말과 영어가 섞여 있었다.

    또 같은 건설회사도 고급 아파트에는 외국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대림은 ‘e-편한세상’과 ‘아크로비스타’, 금호는 ‘어울림’과 ‘리첸시아’, 롯데는 ‘낙천대(樂天臺)’와 캐슬을 각각 일반과 고급 아파트에 다르게 붙이고 있다.

    동덕여대 채완 교수(국문학)는 “아파트 이름의 외국어 이름 선호는 ’소비자에게 아부하기‘라는 고전적인 광고 전략’의 하나”라며 “‘공부를 많이 하셨으니 그 정도 외국어는 아시겠지요’라는 의미로 현학적인 이름을 짓는 것”이라고 ’아파트 이름의 사회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밝혔다.

    또 다른 광고 전문가는 “어지간한 영어는 다 쓰여서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신조어까지 만들어낼 지경”이라며 “3~4년 전까지도 ’(외국어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광고주가 한둘은 있었는데 요새는 한글 이름이 나오면 어색해할 정도”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