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아침논단] 잘생긴 한국 - 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0. 6. 10:32

  
[아침논단] 잘생긴 한국

그러나 추석을 지내러 서울을 나서자
차창에 보이는 마을은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색상도 방향도 마을을 소란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 2009년 10월 6일  조선일보

 

  벌써 한 십수년쯤 되었을까요? 재불 화가 이성자 선생이 남불(南佛)에 스튜디오를 완공하였다 해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분 그림의 중요 주제인 음양의 모습으로 둥근 형태의 두 동(棟)이 서로 마주하는 그런 설계였는데, 그 집이 건축 허가가 되지 않아 한 십년 동안이나 시청을 설득하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집을 아티스트의 기념관으로 해석, 특별할 수 있다고 보고 드디어 허가를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별일이다, 자기 돈 내고 집을 짓는데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 뒤 근처를 지날 일이 있어서 방문 약속을 했는데,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로 작은 비행기가 뜨지 않아 대신 버스와 택시를 타야 했습니다. 택시 운전사는 누구네 집을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한국인, 여류 화가, 미술관, 하얀 집…. 이렇게 기사에서 읽은 특징을 더듬거리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엄지와 중지를 모아 '딱' 소리를 내며 자기가 알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언덕을 오르고 꼬불거리는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정말 이 친구는 아는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조금 헤매어도 차라리 좋겠다 싶었던 것은 마을의 경치였습니다. 모두가 높지 않게 2층 구조에 하나같이 붉은 기와를 이고 있어서 마치 그 땅에서 오래전부터 솟아나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시골이었습니다. 숲의 초록 빛깔과 황토색이 어찌나 좋은 조화를 이루는지요. 그러고 보니 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언덕의 붉은 흙이 기와 색깔을 닮고 있었습니다. 닮은꼴, 유사한 색상의 집합 미학이라니…. 기시감이나 아니면 흑백으로 꾼 꿈처럼 꼭 언젠가 와본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우리나라 예전 시골이 색상만 다르지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같습니다.
   운전기사가 다시 손가락을 딱 치며 가리키는 언덕길 아래의 집. 아, 제가 보아도 이성자 선생의 화실인 줄 담박 알았습니다. 그 집만 하얀색이었고, 동네 이웃들과 전혀 다른 구조의 설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고장은 집을 지을 때 엄격한 기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색상·높이·스타일 등 기준을 정한 몇 가지의 완강한 원칙은 누구라도 비켜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그 지역에서 나는 흙으로 구운 기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참, 예전에는 법 없이도 그리 예쁘게 짓고 살지 않았나 돌이켜 보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겸재 전시를 보았습니다. 관념산수에서도 진경산수에서도 아름다운 경치를 관조할 만한 어느 부분에는 꼭 한 칸짜리 작은 정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절 따라 변화하는 경치 바라보기를 가장 심오한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나 혼자 새삼스러워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집을 지어도 앞마당을 요란하게 하지 아니하고 저 건너 산과 들의 경치를 빌려온다는 차경(借景)이라는 단어에서도 짐작됩니다. 그렇게 주변 경치를 사랑하고 염두에 둔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추석을 지내러 서울을 나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우리 고장은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곳일수록 색상도 재료도 심지어 집의 방향조차 마을을 시각적으로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옆 건물과 너무나 바짝 붙여 지은 아파트 아래 두어 층은 가을 햇살 대비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돌, 바람, 물, 빛인 것이다.' 프랑스 문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입니다. 야박해진 인심과 더불어 우리 풍경 속에 세워진 우리의 건축물에서는 풍(風)을 짚어낼 수 없고, 정체성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고민 뒤로하고 얄팍한 경제원리로 지어져, 몇십년 뒤에 다시 그 건물을 활용할 만한 미래와 문화를 짊어지고 나갈 존엄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신·생각·꿈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온 것이 인류사의 중요한 욕망이요, 주제였습니다. 이를 물질화시키는 '물질적 상상력'이 풍광과 더불어 남달랐던 우리 민족의 능력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사고와 표현이 문화적·경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긴 시간을 두고 우리를 담고, 남에게 보이고, 쌓여서 재가공되고 그래서 결국은 비용도 아끼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국가적으로 큰 지휘를 해나갈 그랜드 디자이너가 필요할 때입니다. 찬반 토론을 넘어 4대강 유역 개발은 우리를 살피고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하려면 욕망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먹고 싶어도 좀 참고 덜 먹어야 하고, 귀찮아도 운동도 해야 하고…. 그것밖에 비법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동네를 잘생기게 만들려면 우리 모두 그런 의식 운동을 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억지로라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법일 것입니다. 우리 법의 잣대에 이런 것들도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