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

시골 농협 조합장의 '모험'… 제주 양배추 농가 살렸다

도깨비-1 2009. 2. 5. 17:40


시골 농협 조합장의 '모험'… 제주 양배추 농가 살렸다

● 최대규모 매취사업 나선 신인준 한림농협 조합장

 

   1일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 양배추밭. 전국 도매시장으로 팔려나갈 양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그 사이에서 한림농협 신인준(63) 조합장이 포장된 양배추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그는 과잉 생산으로 산지에서 폐기될 처지에 놓인 농산물 한 품목(양배추) '거의 전체'를 사들여 시장에 판매하는 대규모 '매취(買取)사업'에 처음 나선 인물. 국내 양배추의 90%를 생산하는 제주도 농민을 살리기 위한 모험이다. 농협의 기존 매취사업이 품목당 생산량의 15% 이하에서만 이뤄진 점과 비교하면 신 조합장의 결정은 '모험'이라 할 수 있다. 농민 김택완(42)씨는 "신 조합장이 아니었다면 이 양배추들은 소비자 식탁에 오르지도 못하고 밭에서 썩었을 것"이라며 "제주의 1640여 양배추 농가가 가구당 평균 354만여원의 생산비를 더 건질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워했다.
   매취사업은 농가에 안정된 소득을 미리 보장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사업 주체인 농협은 모든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 파산 위기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 이 '모험'에 한림농협이 나선 것은 35년 농사꾼 출신 조합장 신씨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합이 230억원 들여 과잉생산 양배추 직접 매입
   생산비도 못 건져 밭 갈아엎던 농민들 시름 덜어
   판로 막혀 조합은 손실… "전국민 소비운동 기대"

   
   올겨울 양배추 과잉 생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출하를 앞둔 작년 11월부터 터져 나왔다. 과잉 생산이 가격 폭락으로, 다시 양배추를 밭에서 갈아엎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된다는 우려였다. 제주시 서부지역 애월과 한림읍, 한경면 지역 5개 농협 조합장들이 작년 11월 9일부터 여러 차례 머리를 맞댔다. 농민을 살리는 길은 지역 농협이 110억원을 들여 매취사업을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역 농협이 농협중앙회에서 구매대금을 빌릴 때 발생하는 이자 8억원은 제주도가 보전해주기로 했다. 집계된 예상 생산량은 재배 면적 1693만㎡에 10만2430여t. 전국 양배추 생산량의 90%에 이르는 물량으로 2007년보다 18% 늘어났다. 예상대로 과잉 생산이었다. 이 중 76%인 7만7380t에 대해 수매계약이 이뤄졌다. 수매가격은 생산 원가 수준인 3.3㎡(평균 양배추 15㎏ 생산)당 2500원으로 결정됐다. 전국 최초로 최대 규모 매취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농협중앙회와 다른 지역 농협의 관심도 집중됐다.
   하지만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1월 22일 열린 긴급회의에서 양배추 주산지인 애월과 한경지역 조합장들이 사업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농협조합의 예상 손실액이 크고 손실 보전방법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림농협 내부도 같은 이유로 반발했다. 하지만 신 조합장은 "농민이 살아야 농협 존재 가치가 있고, 실패하면 조합장에서 사퇴하는 것은 물론 전 재산을 내놓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결국 두 차례 긴급 이사회를 거치면서 이사진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한림농협이 제주 전역에서 생산된 양배추 물량까지 '홀로' 떠안기로 했다.
   신 조합장은 농협중앙회로부터 수매대금 110억원과 수확작업 인건비 및 유통비 120억원 등 230억원을 대출받으면서 매취사업을 본격화했다. 이 규모는 한림농협이 1년간 모든 사업에 투입하는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다. 작년 농협중앙회가 전국적으로 실시한 매취사업 규모인 360억원의 64% 수준이기도 하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1000원대(3.3㎡ 기준)에 형성됐던 밭떼기 거래가 중단됐고, 밑바닥을 치던 시장 가격도 전년 평균의 절반 수준인 3000~4000원대(8㎏ 기준)로 올랐다. 수매대금이 농가에 풀리면서 올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지역 경제에 윤활유가 됐다. 산지 폐기에 들어갈 제주도 예산 60억원도 고스란히 건졌다.
   농민들은 한숨 돌리게 됐지만 신 조합장과 한림농협 앞에는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경기 침체로 작년보다 양배추 소비가 25%가량 줄면서 판로가 막힌 것. 신 조합장은 "오는 4월까지 전국 도매시장에 하루 평균 750t이 출하돼야 적자를 면할 수 있지만 실제 출하량은 400t에 그치고 있다"며 "8㎏들이 한 마대당 평균 가격을 3000원대로 유지하려면 출하량을 마음대로 늘릴 수도 없다"고 했다. 기대를 걸었던 군납(軍納)도 해군이 100t가량 사주는 것에 그쳤다. 농협중앙회에 도움을 청했지만 묵묵부답이다. 한림농협은 물량 처리가 이 수준으로 계속될 경우 4월까지 50억원가량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김승삼(46) 한림읍 대림리 이장은 "신 조합장의 '농민 사랑'이 성공하도록 전 국민이 양배추 소비운동을 벌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 조선일보 2월 3일 >

 


"제주산 양배추 사자" 전국에서 구입 문의 줄이어

 

   '생산 과잉으로 인한 가격 폭락으로 고통을 겪는 제주도 양배추 재배 농민을 살리기 위해 시골 농협조합장이 팔을 걷고 나섰다'는 본지 보도(3일자 A11면) 후 전국에서 제주 양배추 소비촉진 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서울시와 25개 자치구는 이번 주까지 직원과 주민을 대상으로 제주 양배추 구입 신청을 받아 통보하겠다고 3일 제주도와 한림농협에 알렸다. 농림수산식품부와 농협중앙회, 농협 서울지역본부도 양배추 판매망 확대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고, 일일 장터 운영에도 나서겠다고 했다.
   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은 "농촌 문제는 여야가 함께 풀어야 한다"며 "여당은 물론 야당에게도 양배추 소비 촉진 운동에 동참하라고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전국에 대형매장들을 운영 중인 롯데마트도 본사 직원을 제주도청에 보내 양배추 판매 방안을 협의했다.
   한림농협 양배추유통사업단 차성준 팀장은 "전국 개별 소비자들의 양배추 구입 문의 전화도 이어지고 있다"며 "관심이 소비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 조선일보 2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