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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사님, 스님, 그리고 묘향다방>

도깨비-1 2008. 5. 11. 18:35
뉴스: <목사님, 스님, 그리고 묘향다방>
출처: 한겨레 2008.05.11 06:35
출처 : 매거진 ESC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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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⑦
친구의 고향에 와서 이미 사라진 것들을 이리저리 더듬어 보다

경주 안강읍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다방 간판들이다. 뭐야 이거. 완전 다방 천국이구먼! 길 가던 사내에게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 어디냐고 물으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럭 화를 낸다. "가뜩이나 여기 있는 다방들 다 불 싸질러 버리고 싶은데, 그건 뭐 하러 물어?" "저 …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그는 내가 누구를 찾아 가는지 빤히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묘향다방'을 가르쳐주었다.

팔뚝만한 포도 세 덩이 이야기

수백 미터 떨어진 묘향다방 가는 길에도 다방이 10여 곳은 보인다. 소방서 근처에 스쿠터를 세우다 보니, 바로 그 앞에 용궁다방이 있다. 허허 희한하다. 소방서 앞에 해태도 아니고 용궁다방이라니. 묘향다방은 옛 소방서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2층에 있다. 늙은 마담이 이곳은 50년도 넘었다고 했다. 1950년대가 어떤지 나는 잘 모른다. 그네에게 이 근처에 '사공'씨 성을 가진 목사님이 없었는지 물었다. 그네는 이리저리 몇몇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모두들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 어디에 포도밭이 많았다던데 그건 기억 나냐고 물었다. 마담은 그도 역시 잘 모른다 했다.

사공씨는 58년생 스님이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곧 재혼해서 꼬맹이 때부터 할머니 손에 컸다. 이건 그러니까 그가 어려서 출가하기 바로 전 이야기다. 나는 내 고향도 아니고 친구의 고향에 와서 이미 사라진 것들을 이리저리 더듬어 본다. 언젠가 해질녘 산책길에 그가 내게 들려줬던 그의 고향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날은 정말 너무 배가 고팠다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에 마을 어귀에 있는 포도밭에서 난 그만 걸음을 멈춰 버렸네.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더군. 난 멍청하게 바라만 봤지. 감히 저 포도 한 송일 먹어본다는 건 꿈도 못 꿨지. 탐스런 그 물건 앞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네. 그때 포도밭을 지키던 주인 아낙이 나를 부르더군. 그러고는 문득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얘야, 네가 먹고 싶은 만큼, 다 따먹어라!'
'….'
나는 지금도 그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네. 그 포도송이가 기억날지언정 말이야. 내가 설령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더라도 무슨 상관이냐 싶더군. 팔뚝만 한 포도를 세 덩이나 따서 정신없이 먹었지. 그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정신을 잃었어. 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야. 갓 딴 포도에 든 독기 때문이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늦여름의 오후, 그 아낙네 집 툇마루에 누워 있더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고 있더라. 그 집에서 나는 저녁상까지 받아먹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네. 내한테는 이것이 고향에 얽힌 유일한 아름다운 추억이지. 후에 몇 십 년이 흐르고 그곳에 가보았지만, 그 아낙도, 그 아낙의 툇마루도, 그리고 포도밭도, 고향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더군.

애틋해질까봐 거절한 김치찌개

나는 다방 구석구석에 있는 오래된 흔적들을 바라본다. 어느 목수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것 같은 아치형 창문이 보기에도 참 옛것이다. 도대체 저 창틀에는 얼마나 많은 페인트를 덧칠했을까. 흐린 어항에서 시간을 지그시 누르고 가라앉아 있는 물고기,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공고문이 눈에 들어온다.

"여자 고용원(아가씨)은 3개월 내에 타 다방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위반시 벌과금 100만원. 라이터·성냥·스티커 외에는 어떠한 써비스도 할 수 없습니다. 위반시 벌과금 20만원.

경주시 다방협회 안강 지회장"
이 지역에서 다방이 얼마나 성업인지 앞뒤 사정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하긴 다방이 흥신소도 아닌데 여기서 누군가의 과거지사를 찾아봐서 뭐하겠나. 다시 헬멧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담이 주방에서 김치찌개를 내오며 말을 건넨다. "이곳이 어릴 적 고향인가 본데, 사람 찾는 데 도움도 못 줘서 어쩐다니. 해도 졌으니 밥이나 먹고 가요." 나야 여행 중이라 늘 배고프지만 굳이 사양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저 밥을 얻어먹는다면 아무래도 이 동네가 너무 애틋해져 버릴 거 같아서.

불 켜진 묘향다방 간판 위로 '우주빛' 하늘이 푸르게 번지고 있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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