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사대문(四大門)은 東-흥인지문, 西-돈의문(敦義門), 南-숭례문, 北-숙청문(肅淸門. 숙정문)이고
서소문(四小門)은 동북-홍화문(弘化門. 혜화문), 동남-광희문(光熙門. 수구문), 서북-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남-소덕문(昭德門. 소의문)이다.
서울성곽도 윗부분이 숙정문이고 시게방향으로 혜화문, 흥인지문, 광희문, 숭례문, 소의문, 돈의문, 창의문의 순서이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로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다.
1395년(태조 4) 서울 성곽과 성문을 만드는 계획에 의해 짓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다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숭례문은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에는 독수리머리(鷲頭)를 올렸다.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언제 변경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팔작지붕이었다고 한다.
기단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숭례문은 전형적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으며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건축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편액은 세로로 쓰여져 있는데 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공장에서 많이 생기는 황과 자동차에서 많이 생기는 질소 등은 물과 만나면 황산같은 강한 산성 물질로 변한다.
산성비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부식시키고 있다.
흥인지문이나 숭례문은 공해와 산성비에 고스란히 드러나 단청이 그을리거나 껍질이 벗겨져 나간다.
숭례문을 예전에는 멀리서만 봐야했는데 요즈음에는 이렇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서울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동쪽에 위치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완성되고, 1453년에 다시 고쳤으며, 이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 존속되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고쳐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虹蜺門)을 만들고 그 위에 2층의 누각(문루)을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돌리고 있으나 이것도 고종 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숭례문은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각제 된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판문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하고 있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말기의 쇠퇴된 수법을 보인다.
보물 제 1호이다.
다른 사대문은 모두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흥인지문만 네 글자인 것은 서울의 동쪽이 지세가 약하기 때문에 지(之) 자를 넣어 기를 보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터
태조 이성계가 서울 도성을 만들 때 사대문의 하나로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웠던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옛 서울고등학교 본관 서쪽)
그 뒤 1422년(세종 4)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워 이름을 옛날의 돈의문으로 고쳤으며 거기에 연유하여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이 새문안으로 불리었고 지금의 신문로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예조판서 민진원의 건의로 광희문을 고칠 때, 목재를 준비하여 돈의문의 문루를 개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돈의문은 철거되어버렸다.
숙청문(肅淸門. 숙정문. 북대문)
숙청문(肅:엄숙할 숙 淸:맑을 청 門:문 문)은 서울성곽의 북쪽 문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 동령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한재(旱:가물 한 災:재앙 재)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에 있기 때문이다.
숙청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때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청문을 숙정문(肅靖:편안할 정 門)으로 이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중종 이후부터는 숙정문으로 불렀다.
숙청문은 다락 없는 암문으로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와 대신하여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하여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홍화문(弘化門. 혜화문)
태조 이성계의 도성계획에 따라 1396년(태조 5) 9월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동소문인 홍화문은 창경궁이 만들어지고 정문의 이름이 홍화문이 됨에 따라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744년(영조 20)에는 문루를 만들었다.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이 대개 닫혀 있으므로 동소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도시계획이라는 명분으로 문루를 헐었고 1939년에는 석문마저 없애 버렸다.
1992년부터 3년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광희문(光熙門.. 수구문)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혹은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과 함께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다.
광희문은 1396년(조선 태조 5)에 도성을 만들 때 동남쪽의 문으로 다른 문과 같이 홍예와 문루를 건설하였다.
1422년 도성을 고칠 때 이 문을 고쳤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도성을 돌로 된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므로 광희문도 함께 고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711년에 광희문을 고치고, 문루는 나무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고치기로 하였다고 한다.
1719년에 문루를 세워 광희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후 홍예만 남아 있게 되었다.
또 1966년에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는 등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의문을 장의문(莊義門 혹은 藏義門)이라고도 하였는데, 그로 해서 청운동·적선동 일대를 장의동(莊義洞), 줄여서 장동(莊洞)이라 칭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소의문(昭義門. 소덕문. 서소문)터
서소문이라 불렸던 사소문의 하나로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서소문동 큰길에 있었는데 일반적인 통행로가 되었고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성밖으로 운반하던 통로 구실을 하였다.
이 문의 창건 당시인 1396년(태조 5) 9월에 다른 성문과 함께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부근은 지대가 낮아서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1422년(세종 4)에 이것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미루어 소덕문으로 고쳐서 지었으리라 생각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소덕에서 소의로 문의 이름을 바꾼 것은 1472년(성종 3)에 예종의 비인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昭德王后)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여 문 이름을 소의로 고쳤다고도 하고, 1738년(영조 14)에 문을 고치면서 문의 이름도 바꾸라는 왕명에 의하여 1744년에 이름을 소의로 고쳤다고도 한다.
소의문은 1914년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다.
문의 형태는 광희문과 비슷해서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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