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상주이야기

옥동서원(玉洞書院)

도깨비-1 2007. 9. 26. 23:12
종    목 시도기념물 
제52호 (상주시)
명     칭 옥동서원(玉洞書院)
분     류
수량/면적 4,545㎡
지 정 일 1984.12.19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시     대
소 유 자 옥동서원
관 리 자 옥동서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상주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54-530-6063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전기 문신인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황희는 태종(재위 1400∼1418)과 세종(재위 1418∼1450)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20여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에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종 13년(1518)에 ‘백화서원’으로 세운 이 서원은 숙종 41년(1715)에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정조 13년(1789)에는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옥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 외에 제물을 마련하는 전사청과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등이 있다.

사당인 경덕사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황효헌·황맹헌·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가운데는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강당은 2층 형식으로 된 기와 건물로 교육 장소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였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 남쪽은 ‘진밀료’, 북쪽은 ‘윤택료’ 마루에는 ‘청월루’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황희 (조선 문신)  [黃喜]

1363(공민왕 12) 개성~1452(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황희 /황희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그러나 태조의 요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학관과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그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고, 1399년(정종 1)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했다. 1401년(태종 1)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이듬해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가 되었다. 1418년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교하(交河)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1422년(세종 4)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 복직되어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의생활을 일신시켰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원나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시의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세종대에는 그간의 국정경험과 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했으며, 왕과 중신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순충보조공신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