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成碩濟,1960년 경상북도 상주시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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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살청(殺靑)’이라는 말이 있다. 죽일 ‘살’자에 푸를 ‘청’자. 푸른 것을 죽인다는 뜻인데, 대나무를 불에 쬐어 대나무의 푸른빛을 빼는 일을 살청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의미로는 사서나 기록, 또 서적을 이렇게도 부른다고 ‘이희승 국어사전’에서는 설명한다.
이 단어는 의미가 무척 풍부하다. 다인(茶人)들은 찻잎을 덖어서 잎의 푸른 기운을 뽑아내는 작업을 일컬을 때 쓰기도 한다. 푸른빛을 빼내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젊은이들도 방자한 그 푸른빛을 뽑아내야 어른이 되고, 청바지도 색이 좀 바래야 더 멋이 난다. 우리 일상에도 살청은 군데군데 숨어 있다. 여름의 녹엽도 언젠가는 태양빛에 살청되어 아름다운 탈색의 과정을 밟는다. 그때 찬란한 단풍빛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살청은 예사로운 말이 아닌 것 같다.
뭔가를 써서 기록하는 것도 살청이다. 종이에 글을 쓰기 이전에 대나무를 잘라 거기에 글을 남겼는데, 그때 대나무의 푸른 기운을 죽이는 것도 살청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도 일종의 살청 같다. 그런데 이 푸른 기운이 유독 남아도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성석제(成碩濟·47)다. 그의 글이 덖지 않은 찻잎처럼 떫다는 게 아니다. 아주 잘 덖어 좋은 차를 우려내는 데도, 사람만은 푸르고 싱싱하다는 이야기다. 살아서 꿈틀거려 분명 깊은 살청의 세계를 거쳤을 그의 글들은 푸르게 빛나고 있다.
“매이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주앉은 자리에서 어린 시절의 성석제를 상상했다. 그는 무척 개구쟁이였을 것이다. 똑똑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웃었을 것이다.
그는 커피를 주문하고, 휴대전화로 뭔가를 똑딱거리면서 “야 세상 참 좋아졌네” 라는 말을 한다. 신기한 세상, 놀라운 세상이라는 말을 하면서 오늘 처음 휴대전화로 송금을 했다고 했다. 2007년 6월26일 오후 4시경, 그는 휴대전화로 처음 송금했다는 것이다. 모바일폰 뒤에 칩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운로드해서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다가 문득 “왜 작가생활을 하느냐”고 물었다. 뭐든 하나만 물어보면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모바일폰과 노트북의 뚜껑을 닫고서는 말했다. 예상대로 나는 줄곧 듣기만 했고, 그는 재미나게 이야기했다.
“체질적으로 매이는 걸 싫어해요.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우리들은 보통 성장기에 꽁꽁 묶여 있잖아요. 그걸 벗어나고 싶어 방황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다 자라서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은 자유로우니까.”
그는 소위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되는 게 두려워 직장을 나온 사람이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정이 그에게는 속박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두렵다니, 그것은 편안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탐험가처럼 세상이라는 거친 산정을 향해 암벽 등반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직장을 관두는 데도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 사표를 내자 동료들이 한번 다시 생각하라면서 술을 사주는 것이었다. 재미있게 술을 마시고 다시 근무하다 또 사표를 내니까 또 술을 사줬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근무하다 또 사표를 내니까 그때는 모두들 그만두라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그가 해준 이야기다.
굳이 작가가 되려고 사표를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단 퇴직금으로 1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다음 문제는 그때 생각하자는 식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내와 약속한 월급 수준의 돈은 매달 통장에 입금했다. 아니, 직급이 올라가듯이 그 액수도 조금씩 많아졌으니 금상첨화다. 생활이 곤궁하게 되어 누추해졌다면 아마 다른 일을 재미있게 했을 것이다.
성석제는 19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 닦는 사람’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처구니가 산다’라는 책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현재까지 그는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노래’, 장편소설 ‘아름다운 날들’ ‘순정’ ‘인간의 힘’, 산문집 ‘소풍’ 등 다수의 책으로 확실한 고정 독자를 확보한 전업 작가다. 그가 최근에 낸 책은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라는 산문집이다.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는 소설가로서 성석제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짧은 글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성석제 소설의 흐름은 지루하지 않다. 우선 자신이 재미없는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의 장편소설 역시 자잘한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식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홍명희의 ‘임꺽정’식이랄까, 처음부터 거대한 흐름의 지도를 그리는 대작과는 거리가 먼 작법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이랄지, 채만식의 ‘삼대’처럼 오래 묵어 깊은 작품이 주는 어떤 의미의 ‘지루함’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무섭고 어려웠던 형
그는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집안이었는데, 성석제의 증조부가 ‘이재에 밝은 분’이어서 상당한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시골의 대농으로 20~30마지기의 논과 10마지기 정도의 밭을 소유한다. 그의 부친은 시골에서는 드물게 대학을 나온 분이었다. 충남대 50학번으로 농학과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신 분이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혼자서는 그 넓은 논밭을 관리하기 힘들어 장남을 불러내린 것이다.
성석제는 노모가 불편해하실까봐 그의 큰형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서 큰형의 위치는 상당하다. 성석제와는 아홉 살 차이가 나는 큰형은 고등학교 시절에 동네에서 어른 대접을 받았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손한 학생이었다. 그러면서 동생들에게는 모범을 보이는 의젓한 형이어서 말 그대로 집안에서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이 무섭고 어려운 형에게 성석제는 글을 배운다.
성석제는 바둑, 당구와 같은 잡기에 능하지만 지금도 낚시만은 하지 않는다. 어린 그가 보기에 무서웠던 형이 가장 즐기는 것이 낚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생이 어찌 그럴까 싶을 정도로 형은 낚시에 몰두했다고 한다. 마치 칠순의 강태공처럼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마을 저수지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찌만 바라보고 있었다. 밥을 날라다주면 미동도 없이 찌만 바라보는 형의 모습이 그의 머리에 각인돼 있다. 그런 엄한 형과 성석제에게 어떤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가 일곱 살 무렵, 김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이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왔을 때 작은 사건이 터진다. 당시 시골에서는 빨랫비누를 만들어 쓰곤 했다. 양잿물을 섞어 만든 비누를 덩어리지어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어린 석제의 눈에는 마치 소똥처럼 보였다.
그 모양이 우스워서 덩어리진 것을 다 뭉쳐놓았다. 그걸 본 어머니가 화가 나서 석제를 잡아 혼을 내려고 했지만, 다람쥐 같은 아이는 도대체 잡히질 않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도 동안인 성석제의 어린 얼굴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침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형이 그 광경을 보았다. 형은 일단 가방을 차분하게 내려놓고, 학생모를 벗어 기둥에 걸고는 지겟작대기를 들었다. 그러곤 “거기 서!” 라는 명령과 함께 어린 동생에게 달려오는 형. 그때 성석제는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부지깽이도 아니고 지겟작대기라니,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더욱더 빠른 속도로 도망을 친다.
‘이리 와라,’ ‘네가 왜 가냐’는 식으로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뒷마당에 닭들이 드나드는 작은 개구멍 속으로 쏙 기어들어가서는 뒷산으로 올라가 다른 동네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렇게 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컴컴해져서 집으로 들어가니 형이 보이질 않았다. 누나들과 고모들이 모여서는 수군대다가 어린 석제에게 어서 형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사죄하라고 했다. 동생의 버릇을 바로잡지 못한 형이 집에 걸어놓았던 소주 대병을 마시고 취해서 골방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어린 석제는 할 수 없이 골방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때 형이 일어나 앉으면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어린아이가 “비누를 그렇게 해서…”라고 하자 형이 말한다.
“그게 아니다. 첫째로 너는 어머니가 오라고 하는데도 오지 않고 도망을 쳤다. 어머니가 오라고 하면 와야지. 둘째는 형이 오라고 했는데도 안 온 것이다. 그 잘못을 알겠느냐.”
그가 알았다고 하자, 형이 “잘못을 알았으면 됐다”고 하면서 자신의 손을 잡는데 확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고 했다. 마치 교회에서 성령을 받는 사람의 느낌처럼 형의 손은 뜨거웠다.
무협지 편력
형은 연세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몸에 병이 생겨 휴학하고 시골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였다. 형은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형은 누워서도 책을 볼 수 있는 특수 독서대를 제작해 책을 보았다.
그런 형을 위해 중학교에 다니는 누나가 도서관에서 ‘혈무문’이라는 무협지를 가져왔는데, 형은 몇 장을 보더니 흥미 없어하는 것이 아닌가. 대신 손가락이 길어 손재주가 많은 형은 뜨개질을 해서 벙어리장갑이 아닌 손가락장갑을 떠서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자상한 성품이다.
당시 성석제는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익혀 신문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혈무문’을 읽어보았는데, 별천지였다. 무협지는 단숨에 그를 매료시켰다. 형을 위해 빌려온 무협지들은 열 살 성석제의 독차지가 됐고, 이때부터 무협지 편력은 시작된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무협지의 황당하고도 광활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마침 부친의 친구 분이 서점을 겸한 도서대여점을 하고 있었다. 참고서와 교양도서는 서가의 한 줄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무협지로 채워진 보물창고였다. 그걸 다 읽는 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빠른 독법이 저절로 몸에 익은 것 같다. 자신은 책을 빨리 읽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다. 그가 동네에서 아이들과 장기 두는 모습을 보던 형이 “유치하게 무슨 장기냐”면서 바둑판을 펼친다. 처음에 25점을 깔고 두었다. 처음 두니 자기 집에 자기 돌을 두어 잡아먹히는 수준이다. 형은 그런 동생의 바둑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이 묵묵히 완전박살을 내버린다.
어린아이는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해서 다음 방학 때 형이 내려오면 박살을 낼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결국 형과는 단 한 판만을 두게 된다. 당시 형의 실력은 9급 정도였는데, 다음 방학 때 동생이 두는 것을 보더니 13급 정도라는 판정을 내려준다. 그래서 자신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9급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둑에서 5급 이하는 별 의미 없다는 부연설명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성석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인 1973년에 형이 병으로 요절한 것이다. 형은 보통 아들이 아니었다. 그 슬픔을 겪은 부모의 심경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노모에게 형에 대한 아픔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바둑 맞수 담임선생님
그 일을 겪은 후 가족은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먼저 가고 성석제는 1년을 그 큰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낸다. 처음에는 서러웠는데, 살아보니 몹시 좋았다고 한다. 집이 넓어서 집안에 들어온 고등학교 자취생과 어울려 놀면서 잘 보낸다. 읍내 만화가게의 모든 만화를 독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서울로 전학을 온다.
서울에 와서 기원을 찾는다. 거기에서 또래가 7급 정도 둔다고 해 돌을 잡았는데 무참히 깨졌고, 그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자신이 성장한 만큼 그 아이도 성장해서 결국 한 번도 못 이겼다고 고백한다. 성석제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바둑 50%, 만화 25%의 생’이었다고 한다. 약은 약사에게 주문하듯이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신고등학교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국어선생을 담임으로 만난다. 그가 문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시절 때부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신입생들의 학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보는 시험에서 국어를 75점 받아 반에서 1등을 했다. 평균이 15점 정도였으니 담임선생의 눈에는 그가 보석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전까지 객관식 문제에 익숙했다. 처음으로 모든 문제가 주관식으로 나와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무협지와 만화로 단련된 성석제의 ‘논술’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담임선생은 그를 곧바로 문예반에 넣어서 창립 90주년 교지를 만드는 일을 시킨다. 편집 일은 그가 특별히 좋아했다기보다 구속받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 어울리는 일이었다. 교지 편집을 핑계로 수업도 빼먹고, 교지를 만들면서 편집일도 배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자신이 문예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교지 일이 끝나자 문예반을 나오고 싶었지만, 깡패 기질이 있는 선배들이 문예반을 나가려거든 ‘빠따’를 맞아야 한다며 몽둥이를 드는 바람에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국어선생님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업시간에 종이에 연필로 바둑판을 그려 몰래 바둑을 두는데, 선생에게 걸렸다. 선생이 너 몇 급이냐고 물었고, 1급이라고 대답한다. 선생은 아마도 ‘요 녀석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선생과 제자는 숙직실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선생과 성석제는 실력이 비슷했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은 금방 친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스승의 눈에 바둑 잘 두고 국어 잘하는 성석제가 얼마나 귀여웠을 것인가. 여기서 그의 바둑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한다. 그는 현재 아마 5단으로 문단 고수 중 하나다. 김성동, 송영 같은 고수들이 있지만, 아마도 그를 가볍게 여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집으로 제자를 데려가곤 했다. 사모님이 선생님과 한참 나이차가 나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분의 말씀이 몇 년에 한 번씩 제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이다. 선생의 집에서는 주로 바둑을 뒀는데, 그 사실을 간파한 친구들이 성석제에게 자신들이 빼앗긴 ‘보물’들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선생 집에는 아이들이 보다가 빼앗긴 무협지와 ‘빨간책(포르노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바둑을 두고 나서 그 압수품들을 좀 가져가도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물건을 돌려주고 빵 얻어먹으며 재미나게 살았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석제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세상을 재미나게 ‘보는’ 사람이다.
기형도와 신대철
최근에 낸 그의 산문집을 보면 그러한 면이 잘 드러난다.
“나는 잘 웃는다. 대학 시절 어떤 자리에서 크게 소리 내어 웃다가 스승으로부터 ‘별일 아닌 것 가지고 뭐가 좋다고 그렇게 혼자 웃느냐’고 지엄한 질타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울상을 지으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서는 실컷 웃고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도 웃을 일이 자꾸 생겨서 귓구멍이 아프도록 후비며 웃음을 참으려고 했던 기억도 있다. 자주 웃고, 웃을 만한 기미에 민감해지다 보니 흥미로운 것, 재미있는 것에는 쉽게 빠진다.”
그래서인지 그는 소설가이면서 짧고 재미난 산문을 맛깔스럽게 써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경신고는 미션 스쿨이어서 수시로 보는 예배 때문에 상당한 속박을 느낀 것 같다. 그리고 교복의 속박감에서 벗어나 대학에 들어간 성석제는 드디어 자유를 만끽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1학년 1학기 동안 미팅을 평균 일주일에 3번 정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55회의 미팅을 하고 나서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연세대 법학과 출신이다. 당시 정외과에 다니던 친구들도 거기에서 만난다. 그중에 고(故) 기형도 시인이 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당시 대학생들이 의무적으로 학점을 따기 위해 군에 일정기간 입소했던 문무대에서였다. 기형도는 노래를 잘했다. 훈련을 마치고 휴식시간에 노래를 하면 노래하는 동안 휴식시간을 연장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기형도가 나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기형도는 노래를 4절까지 불러서 훈련받던 학우들을 푹 쉬게 했다. 필자도 시운동 동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시절에 기형도의 노래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노래는 성악 창법으로 유장하게 좌중을 압도한다. 성석제는 2학기 때 복도에서 기형도와 마주쳐 이야기를 나눴다.
기형도는 그에게 연세대 문학동아리 가입을 권했다. 마침 1학기 때 미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그 통과의례를 마치고, 뭐 좀 재미있는 것 없나 하던 참이라 친구를 따라 문과대 수위실 맞은편에 있는 문학동아리를 찾았다.
동아리 방은 6·25전쟁 때 감옥으로 쓴 적이 있는 컴컴한 공간이었는데, 가운데 긴 탁자가 있었다. 마침 그 탁자에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성석제는 그래, 이제부터 여기에서 내기바둑을 둬서 점심을 해결하자는 생각에 가입했다고 한다. 문학동아리는 그에게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서로 쓴 시를 발표하고, 깨부수고, 끝나면 저녁 때 선배들이 술 사주고, 여기에서 그는 기형도, 권진희 등과 어울리면서 잘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에 한 시인이 찬란하게 나타난다. 무인도에 있다가 사람을 만난 격이었다. 교양국어 시간에 만난 신대철 선생이다. 신대철 선생은 강의를 무척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재미난 이야기 덕분에 그가 좋아졌고, 선생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읽고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릴케, 하이네의 시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신대철 선생의 시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눈이 확 뜨인 것이다. ‘그래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한번’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돈을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 바로 신대철 선생의 시집이라고 했다. 그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대단히 치열하고 힘들게 사신 분”이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만다. 필자 역시 그 시대의 시집 두 권을 꼽으라면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을 깨는가?’를 들겠다.
스승이자 인생 친구인 정현종
1979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 이듬해가 바로 1980년이다. 3월에 학교는 휴교를 한다. 시위와 전두환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우울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도 역시 치열하게 놀았다. 시골에 내려가 모내기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하지만 가까이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다.
그는 판·검사가 되기 위해 법학과에 간 것이 아니었다. 법학과에 가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매력적인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같이 신문방송학과에 가자고 한 약속을 어기고 법학과에 입학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재미가 없어 3학년 초에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다녀오니 기형도가 교내 문학계를 평정하고 졸업을 한다. 이에 자극을 받아 쓴 시로 교내문학상에서 가작상을 받았다. 당시 당선작은 심종철의 작품. 이때 심사위원이 정현종 시인이다.
성석제는 스승 정현종 시인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분을 이야기하자면 우선은 술을 많이 사주시는 어른이었다고 한다. 스승은 만나면 만날수록 ‘바닥이 없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바닥이 없어, 솟아나는 샘처럼 항상 새로운 분이라는 것이다. 즉 반복이 없어 지겹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던진다.
“선생은 애인으로는 최상급일 겁니다.”
그리고 토를 단다.
“그런데 연세가 많으셔서 문제지요, 히히.”
제자는 지금도 스승을 한 달에 한두 번 찾아뵙는다. 20년 이상을 만났는데도 여전하시다. 그런 모습에 놀란다고 한다. 선생은 “총명하다”라는 표현을 잘 쓰는데, 정작 선생이 총명한 분 같다고도 했다.
성석제에게 정현종 시인은 대학 스승이면서 인생의 친구 같은 분이다.
“그동안 제가 쓴 시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일상적인 이야기 몇 마디 하고, 주로 산에 많이 가는데 여름날이면 ‘산도 덥구나’라든지, 같은 장소에 여러 번 찾아가서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르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두 마디 나누는 겁니다. 그리고 산속의 나무를 지나치면서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상수리나무, 동백나무, 피나무, 소나무 등을 가리키면서 이 나무는 이러이러한 나무라는 식이지요.”
성석제는 스승의 인품을 선생이 오랫동안 신고 있는 등산화에 비유했다.
“선생님 신발 좀 바꾸세요라고 말씀드리곤 하죠. 10년 정도 된 듯한 선생의 등산화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남루해 보였거든요. 그럼 ‘나도 바꿀 생각이 있는데…’ 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맙니다. 산을 내려와서 등산화 가게에 여러 번 모시고 가도, 한번 둘러보고는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는지, 늘 다음에 사지 뭐…, 하시지요. 아마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아요. 아직도. 그런 면이…, 존경스럽습니다.”
그분과는 이런 인연으로 맺어져 지금까지 지극하게 모시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다. 시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만 해도 장광설이다. 그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들이 성석제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질문할 수 없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도 벅찼다.
1979년에 입학해서 86년에 졸업한 대학시절. 그는 이 시절 집에서 잔 것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절반은 친구들과 함께 잤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첫 시집을 낸다. 그의 책 표지에 실린 이력을 보면 시인으로서의 경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는 두 권의 개성 있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다. 시를 굳이 문학의 모성으로 비유하지 않더라도 우리 문단에는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가 적지 않다. 친구인 원재길을 비롯해 윤후명, 이제하, 마광수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이가 시인으로 출발한 소설가들이다.
탁월한 이야기꾼
그들의 이력이 소설가로 굳어지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석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큰 배가 침몰하면 소용돌이치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는 단순히 잡학에 흥미가 많은 정도가 아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녹이고, 다지고, 결국 한 편의 빛나는 황금빛 잔을 만들어내는 장인과 같은 모습이다.
1992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루 사이로 세상을 뜨신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호적상 가장이 되어버렸다. 묶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 짐이 많아진 것이다. 서유기에 저팔계가 남긴 ‘먼 길에 가벼운 짐 없다’는 명언이 있다. 그도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가족과 일, 그리고 재미나는 직장. 졸업하고 이어진 회사생활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재미있게 했을 것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예술가 기질로 그는 일상적인 업무에서도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평사원이면서도 갖은 이유로 ‘이사급 출장’을 많이 다닌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3년에 사표를 낸다. 1994년 중반엔 신림동 하숙촌에서 한여름을 보낸다. 무척 더운 해였다.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불어 이불을 덮고 자야 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곳이었지만, 웬걸 그해의 무더위는 그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정리했다. 시집 정리가 의외로 일찍 끝나는 바람에, 나머지 시간에 그동안 쓴 짧은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를 쓰면서 자신을 잡아당겼던 것들, 이렇게저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메모해놓았던 것들, 즉 시인으로 쓴 글이 아닌 비시적(非詩的)인 원고를 나름의 스타일로 정리한 것이다. 아침에 샤워 한 번 하고 한 편 쓰고, 동네 어귀 슈퍼마켓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다시 샤워하고 또 한 편 쓰고 하는 식으로 정리한 원고들, 그야말로 스스로도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원고들은 어처구니없이 태어난다.
그 원고를 당시 민음사 주간이던 이영준 씨에게 넘긴다. 이영준씨는 출판해달라는 의도로 보내온 원고인 줄 알고(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다른 편집위원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원고를 본 편집위원이 책으로 출판하자고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책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가 그에게는 소설가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이 출판되자 독자와 문단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의 이야기 실력을 믿고 발 빠르게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첫 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첫 단편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이 소설로 그는 탄탄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상문학상 후보에 선정돼 문단의 인정을 받았고, 영화사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려 판권 계약을 한다. 그 뒤로 계속 청탁이 들어온다.
그의 탁월한 이야기 실력의 근원은 사람들이다. 그의 주위에는 그보다 더 재미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필자 역시 10여 년 전에 성석제의 책을 만든 경험이 있는데, 그때 성석제에게서 정말 재미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저에게는 행운인 것 같은데, 내 주위에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서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 이야기가 활자화되고 나면 의외로 그 오리지널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서 힘을 잃어요.”
성석제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참 많은 나라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어처구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어처구니는 상상 밖으로 큰 물건이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경쾌하다. 그 경쾌함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똥장군의 테두리
“단편이나 장편이나 소설은 장르에 관계없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에너지가 느껴져야 된다고 믿습니다. 에너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글을 읽다 보면 억지스럽게 썼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 에너지가 부족해서, 힘이 달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맥주 같은 음료가 에너지가 웅성거리는 술이 아닐까? 성석제는 맥주를 좋아하는데, 땅콩은 먹지 않는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서다. 차를 마시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로 넘어간다. 맥주를 마시면서 요즘에는 맥주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맥주에 대한 짧은 글을 준비한다고 했다. 발효시킨 보리음료인 맥주의 역사가 술 중에서는 아마도 제일 오래됐을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있었는데, 그때는 맥주를 액체 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음식에 관한 글을 많이 쓰는 편이다. ‘소풍’은 음식에 관한 에세이다. 필자 또한 과거 음식에 관한 산문 연재를 그에게 제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일로 바빠, 필자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한 권 먼저 써버린 적이 있다. 나중에 성석제의 책을 읽고 그 책 괜히 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석제는 작가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읽고 좋아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잘 읽은 소설가의 스타일을 닮을 수밖에 없다.”
성석제는 자신이 읽고 좋았던 소설로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와 베케트, 프랑스의 이오네스코와 사르트르와 같은 작가들의 단편을 들었다. 이 작가들은 짧고 간결하지만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충혈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 역시 그러하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다. 처음에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소설이란 표현의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과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죠. 즉 소설은 공감의 매체입니다. 글의 그릇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더 재미있는 말로 소설을 이야기해줄 것을 권했다. 아마 우리 둘 다 술이 취했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기 위해 쓰는 물건 중에 똥장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농사지을 때 전통적으로 쓰던 거름을 지고 나르는 물건인데, 인분을 져 나르기 때문에 이 통이 새면 낭패지요. 냄새가 얼마나 나겠어요. 그래서 나무통으로 만든 똥장군의 테두리는 잘 마른 대나무로 친친 감아놓습니다. 단단하게 밀착시키기 위해서지요. 내 어린 시절 활놀이할 때 쓰기에는 똥장군의 대나무 줄기만한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 테두리 잘 마른 대나무를 골라서 벗겨내어 활을 만들어 한겨울 잘 놀았지요. 이듬해 집에서 머슴이 내가 테두리를 몰래 빼낸 것을 모르고 그 똥장군에 거름을 담아 나르려고 들어 올리다가 그만 와르르 거름을 쏟아버리고 맙니다. 그때 머슴이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석제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머슴이 왜 내 이름을 불렀을까? 소설이 뭐냐고요? 소설은 똥장군이고, 억울한 머슴이고, 똥장군 안에 담긴 똥오줌일 수도 있지요.”
‘바람의 전설’ 주인공이 바로 나
한바탕 웃고 났지만, 뭔가 가슴에 남는 게 있는 이야기다. 점점 더 취기는 오르고, 성석제는 시인으로서의 생활도 이야기했다. 시인으로서 살 때는 세상 물정을 몰랐지만, 시를 쓰던 시절에는 행복했다고 한다. 그 행복이 무엇일까? 소설을 쓰는 지금은 재미있다고 한다. 그 차이를 성석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죠.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신만의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증폭되는 힘이 있어요. 그것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예술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는 예술이겠지만, 물론 언어미학이 뛰어난 소설도 있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소설이란 대화의 한 방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 언어를 가지고 예술을 하고 싶었다면 아마도 나는 시를 썼을 겁니다.”
그의 경쾌함은 이런 면에서 빛을 발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성석제의 소설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소설이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작품이 의외로 그 함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석제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서의 소설, 그것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하다. 그의 소설 ‘소설 쓰는 남자’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바람의 전설’에는 한 예술가가 나온다. 무도 예술가다. 그는 그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성석제가 무도 예술인이란 말인가? 아니, 그 반대의 경우였다. 그는 그 주인공들과 정반대의 경우로서 예술가라고 표현했다. 춤을 전혀 출 줄 모르는 예술가와 춤을 잘 추는 무도 예술가는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이다. 그 소설의 모티브는 어느 날, 캬바레에 다녀온 후배가 막연히 퇴폐적으로만 보이던 그곳의 놀라운 세계를 전해주면서부터였다. 그곳은 정말 예술가들의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즉 학력, 외모, 재산으로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춤 하나로만 결정하는 진짜 선수들의 세계를 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당신 제비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을 향해 극중 주인공인 영화배우 이성재는 또박또박 말한다.
“나, 제비 아닙니다. 예술갑니다. 무도 예술가.”
그런 식으로 성석제도 예술가다. 세상을 무대로 비유한다면 그는 연극배우이고 춤꾼이면서, 자연으로 비유하면 그는 지루한 겨울을 깨우기 위해 남쪽에서 날아온 제비이고, 눈앞에 확 나타나는 어처구니이면서, 결국은 예술가다.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