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 외 산 이야기

도깨비-1 2007. 6. 29. 19:41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에서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산의 옛 명칭입니다.

지금의 에베레스트산의 이름은 식민지 시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지에서는 당시 티베트명인 '초모랑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초모랑마(Chomolungma)는,

'Chomo(여신)' + 'Lungma(세계)'가 합쳐진 단어로 '세계의 여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이름은 영국왕실지리학회가 전임 측량국 장관이었던 죠지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한 것(1865년)에 유래하고 있습니다.



제 목    [산 그리고 사람] 01 이승과 저승을 건너뛴 백준호 



원문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3/h2006030117281475680.htm

 


 이승과 저승을 건너뛴 백준호 - 심산 산악작가

 

 

 


뻔한 죽음의 길…미련곰탱이는 동료를 구하러 갔다

셰르파도 절레절레 포기한 에베레스트 최난 구간…

어둔 밤길 홀로 떨치고 올라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 본다

"형, 뭐하러 왔어?" "그러게, 근데 경치는 조~오타" 정상서 웃고 있는 그가 보인다.

 

 

 산과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다. 산에 오르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간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 그리고 사람’은 그런 의도로 기획됐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요 몇 년 사이 네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산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과 등반을 떠올릴 때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존재론적 전율을 느끼고, 가슴이 쿵쾅대다 뜨겁게 달아오르며, 끝내는 목울대를 꿈틀대게 만들고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그는 백준호다.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가 유명 산악인이 아닌 까닭이다. 일반인들은 물론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름은 귀에 설다. 나 역시 살아 생전 그를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지난 해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일원으로서 그의 시신을 수색하러 에베레스트에 다녀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모질고 힘겨웠던 취재과정에서 접하게 된 그의 삶과 등반은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활화산이 됐다.


‘백카스’와 ‘미련곰탱이’. 백준호의 동료 선후배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두주불사의 호쾌한 술꾼이어서 백카스요, 우직하기만 할뿐 도무지 요령 피울 줄 모른다 해서 미련곰탱이다. 백카스는 자신이 운영하던 갈비집을 언제나 산악인들로 북적이게 만들었지만 돈 챙기는 데는 영 재주가 없던 한심한 경영자였다.


미련곰탱이는 후배들에게 물려줘도 될 온갖 허드렛일을 앞장서 해치워버리고는 힘에 겨워 헉헉대는 답답한 사내였다. 그래서였다. 그의 동료와 선후배들은 그를 사랑했다. 앞뒤가 꽉 막힌 이 경상도 사나이는 오랫동안 벅찬 꿈을 하나 갖고 있었다.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이다.


2004년 5월18일 오후 3시. 그는 필생의 꿈에 바투 다가서 있었다. 정상 직전의 마지막 기지인 캠프5(8,300m)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비보에 접하고 만다. 그날 오전 10시에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했던 같은 원정대의 박무택이 조난을 당하고, 함께 올랐던 장민은 실종됐다는 소식이었다.



급히 베테랑 셰르파에게 구조작업을 지시했지만 허사였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며 되돌아 온 것이다. 당시 박무택이 설맹과 동상으로 인해 완전 탈진 상태에 빠진 채 쓰러져 있던 곳은 8,750m 지점. 그에게는 밤을 지새울 장비도 없었고, 산소통의 계기판은 이미 제로(0)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대로 놓아두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했다. 여러분이 백준호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구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산을 아는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적어도 8,000m 이상을 올라가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무겁게 외로 튼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모두 정복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8,000m 이상의 히말라야를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그곳에서는 육체와 정신 모두 통제 범위의 바깥으로 내몰린다. 간단히 말해 제 정신으로 제 몸 하나 가누기조차 버겁다. 냉정하게 말해 그런 상황에서라면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왜? 조난자를 구조할 가능성이 0%이니까. 구조하러 나선 자마저 불귀의 객이 될 가능성이 100%이니까.


그런데 백준호는 갔다. 이 미련곰탱이는 이미 칼바람이 어둠을 가르는 영하 30도의 암흑천지 속으로 홀로 떨치고 일어나 올라갔다. 나는 이 남자의 결단이 무섭다. 그의 결단과 실행에 전율한다. 그 밤을 꼬박 새워 에베레스트의 최난 구간이라는 ‘세컨드스텝’(8,600m)을 오를 때 백준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넘겨짚어 볼 수 없는 경지다. 백준호는 이튿날 새벽 6시, 기어코 박무택과 조우한다. 이후 구조에 성공했는지, 생환에 성공했는지는 일단 접어두자. 그날 밤의 등반을 나는 감히 ‘한국 등반 사상 가장 의롭고 외로운 등반’이라 부르고 싶다. 그날 밤의 등반을 통하여 백준호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심연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2004년 5월19일 새벽 6시. 박무택을 만난 백준호는 전진베이스캠프의 원정대장과 무선교신을 나눈다.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구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다. 박무택의 시신은 이듬해인 2005년 5월29일 엄홍길이 이끈 휴먼원정대원들에 의해 수습됐다. 백준호는 실종됐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박무택의 시신 바로 아래 쪽에 덩그라니 놓여있던 백준호의 배낭뿐이다. 여기까지가 확인된 사실이다.


나는 이따금씩 그들이 나누었을 최후의 대화들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박무택은 백준호를 만나자마자 눈물부터 흘렸을 것이다. 홀로 세계의 지붕 끝에 버려진 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 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 아마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준호형, 누가 미련곰탱이 아니랄까봐…여기까지 뭐하러 올라왔어?” 백카스는 피식 웃는다. “그러게 말이다…여기서 널 보니까 술 생각이 나네… 야아, 경치 조오치? 그치? 이런 농담들을 나누면서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남겨진 지상 위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박무택이 젖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한다. “형, 평생 소원이 에베레스트 올라가는 거였잖아? 여기서 한 시간도 안 걸려…”


나는 상상한다. 나는 현장에 다녀온 산악작가로서, 그리고 캐릭터와 드라마를 다루는 시나리오작가로서, 그렇게 상상한다. 행여 이런 상상이 고인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려우면서도 가슴 뜨거워지는 상상은 어찌할 수 없다. 여기 구조는 커녕 생환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두 사나이가 있다. 박무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하지만 백준호에게는 아직 약간의 체력이 남아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백준호가 자신이 품어온 필생의 꿈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백준호는 끝내 박무택의 곁에 남아있기를 고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박무택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형, 올라갔다 와…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홀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 있는 백준호를 상상한다. 그에게는 배낭조차 없다. 산소통도, 카메라도, 피켈도, 깃발도 없다.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등정을 증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 지구라는 행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홀로 서서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망연히 굽어볼 뿐이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심연을 훌쩍 건너뛰고 필생의 꿈을 이룰 기회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친 자만이 머금을 수 있는 잔잔한 미소를.


■ 백준호는…

백준호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대건고 재학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한 전문 산악인이다. 86년 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후 대학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의 산들을 쏘다녔다.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동아제약에서 근무하다 200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자로 나서면서 오랫동안 꿈꿔 왔던 히말라야 등반에 매달렸다.


2000년 초오유(8,201m), 2002년 로체(8,586m) 등반에 성공한 다음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정상 공격일을 하루 앞둔 2004년 5월18일, 같은 원정대의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이 조난을 당하자 홀로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그의 시신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찾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의 북측 베이스캠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향년 37세.



 

[도올인터뷰] 히말라야 16좌 세계 첫 완등 `진정한 영웅` 엄홍길 [중앙일보]

`죽을 고비 수천 번 … 꿈·열정으로 이겨냈죠`

마지막 300m가 3000m보다 긴 느낌 정상에 섰을 땐 모든 걸 잊었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한가한 언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언설도 너무 한가하다. 너무 제멋대로인 것이다. 한가하기 때문에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보편적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순결한 지고의 목표를 향해 매순간 생사의 기로가 결정되는 치열함, 그 열정과 진실이 실종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열정과 진실을 위장하려 해도 그러한 위장이 통할 수 없는 삶의 긴박감과 필연성, 그 극적인 사례를 나는 엄홍길의 로체샤르 등정에서 본다.


히말라야에는 8000m 이상의 봉우리가 14좌 있다. 이 14좌를 완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열두 사람 있는데, 그 명단 중 세 사람이나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도 끼여 있지 않은데. 우연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사실은 퍽 충격적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도전은 고구려 기질을 이어받은 진취적 기상과 모험정신, 신라인의 전략성과 지구력, 백제인의 섬세한 감각 그 모두를 합친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나는 평소 이창호의 바둑과 엄홍길의 등정을 어김없는 우리 민족 저력의 발로로서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알피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히말라야 완등은 16좌가 되어야 한다는 전설이 있어 왔다. 위성봉이지만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가 주봉으로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16좌의 전설을 달성치 못했다. 그런데 엄홍길은 이 전설에 도전장을 냈다. 2000년 K2에 올라 14좌 완등을 달성한 그는 2004년 5월 5일 얄룽캉을 오르는 데 성공했다. 최후의 도전은 로체샤르! 로체샤르는 로체 옆에 있는 봉우리지만 평균 70도가 넘는 각도로 깎아지른 빙벽이 3000m나 뻗어 있는 거대 직벽이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충분한 히말라야 난공불락의 최난등 코스로서 그 외연(巍然)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엄홍길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두 번째 도전 때는 베테랑 산우(山友) 황선덕, 박주훈을 불귀의 객으로 보냈다. 정상을 불과 150m 눈앞에 두고 아차 하는 순간에 디디고 있던 빙판이 떨어져 나가는 판상눈사태가 벌어졌다. 밧줄이 스르르 그의 장갑을 태우면서 빠져나가 버렸다. 만약 밧줄이 그의 몸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면 그 순간에 같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2006년 3월 16일 세 번째 도전을 위하여 출발했다. 70일의 사투 끝에 8200m 지점까지 올랐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로체샤르의 신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겸허하게 퇴각했다. 정상 정복보다도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


2007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한 4차 등반을 앞두고, 엄홍길은 나 도올을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나는 일본 중앙알프스에서도 그에게 등반훈련을 받았다. 나의 모험심도 그칠 줄 몰랐다. 사실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따라 최소한 베이스캠프까지는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4월 중순까지 나에게 전 대원의 사인이 든 엽서를 보내왔다. 지난달 31일 그가 드디어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보다도 그의 삶의 갈망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 수없는 절망의 순간들을 상상하고 있었기에. 3일 오후 4시50분 나는 편집국에서 베이스캠프(5220m) 철수를 앞둔 엄 대장과 긴 통화를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는 "아이쿠 선생님! 기적입니다! 기적!"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먹이는 듯했다.

 

-우선 대체적 상황을 좀 설명해주오.


"기상조건이 최악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설상가상 몬순 시즌이 닥쳤습니다. 모든 팀들이 다 철수하는 판인데도 저는 집요하게 버티었지요. 요번만은 로체샤르의 신(神)이 저를 받아주리라는 묘한 믿음이 있었어요. 에베레스트 쪽으로는 폭설이 쏟아지는데 로체 쪽으로 갑자기 날씨가 개기 시작했어요. 기적이었죠. 이 마지막 일주일간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저는 히말라야 등정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그 순간의 느낌을 말해주오.


"정상 오름이 최후적 목적임에는 분명하지만 요즈음은 맹목적 등정(登頂)이 아닌 등로(登路)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캠프 4(8100m)에서 정상까지 고도 300m라지만, 실제적 루트는 3000m보다 더 긴 느낌이죠. 더구나 그 3분의 2가 인간의 발자취가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는 초등(初登)코스예요. 그러니 그 위험은 예측을 불허해요. 대원 4명이서 겨우 산소 한 통! 물 반 리터! 보통 최후에 산소 두 통은 가지고 떠나는데 위험상황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한 겁니다. 그 갈증과 호흡곤란, 기아, 탈진, 영하 40도의 추위에 당하는 동상, 13시간의 사투 끝에 도달했을 때 와아~ 뭐라 말씀드리면…."


-그 순간의 느낌을 좀 말해달래두.


"아이쿠 선생님, 인간이 극도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어버려요. 내 손발의 동작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아(無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언어로 전할 수 있는 '느낌'이 없어집니다. 지원사들의 깃발을 들고 사진 한 장 찍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등정의 기쁨과도 같은 감정의 노출조차 사치가 됩니다. 오직 어떻게 내려갈까 하는 일념뿐이었죠."


-그래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폭설이 개고 순간 티베트, 네팔 쪽으로 사통팔달 환하게 시야가 트이더라고요. 그런데 때는 이미 오후 6시 반! 미션 임파서블의 시간이었죠. 등정은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오후 6시 반 등정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달밤에 70도 빙벽을 착지(着地)된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산해야 하니까요. 아이젠을 더듬거리며. 그런데 설상가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죠. 대원 변성호가 설맹에 걸린 겁니다."


설맹(雪盲)이란 만년설의 반사광을 너무 쏘여 순간적으로 망막 파괴가 일어나 시력을 상실하는 병인데 시각장애인과 같이 앞을 못본다. 2005년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를 결성케 만든 그 주인공 박무택도 바로 설맹으로 최후의 동반자였던 장민을 먼저 하산시키고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엄홍길은 칸첸중가(8586m) 등반 때 박무택과 비부아크(Bivouac.아무 장비 없이 정상 부근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움) 했던 기억도 있다. 요번에 변성호까지 박무택의 비극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200m짜리 밧줄에 의지하면서 제가 앞장서고 그 바로 뒤에 성호, 그 뒤에 상현, 그 뒤에 셰르파, 타이트하게 움직이면서 앞 못 보는 성호를 인도해 갔습니다. 총 25시간의 사투! 저는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발자국에서 생사가 갈라지는 빙벽, 암벽, 암빙벽의 준험한 직벽에서 한 단락 끝나면 소리치고 또 소리치고, 죽을 고비는 수천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이스에서 무전신호가 왔지만 장갑 벗고 마스크 벗고 전화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엄홍길의 위대함은 바로 그러한 상황판단과 절제력에 있다. 그는 운명에 순종하면서도 신적 경지에 도전하는 괴력이 있다. 나는 갑자기 얄궂게 질문을 던졌다.


-그 위험한 산엔 도대체 왜 가오?


"아이쿠, 선생님! 왜 가다니요? 저는 전생(前生)이 산(山)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바위였고 나무였고 바람이었습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문명의 장대함을 과시해도 하나의 자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산과 저는 엄마와 자식 관계 같습니다. 산에서 죽어도 엄마품에서 죽는 것이죠. 산이 있음으로 해서 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산이 곧 나고, 제가 곧 산이죠."


-그대의 성공을 기도한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로체샤르 직벽을 달밤에 내려올 때 우리는 인간이 6척 단구를 가지고 자연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만 순간순간 확인될 뿐 의식이라는 존재만 둥둥 떠내려 왔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무의식적 집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조건에서도 꿈과 열정만 있으면 ….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신념 없이는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증발해버렸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꿈과 열정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등반은 그러한 능력의 한 표현일 뿐이죠."


-귀국하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지은이와 현식이를 껴안아주고 싶습니다."


딸 지은은 초등학교 4학년이고 아들 현식은 2학년이다. 이것이 인류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전설을 만든 엄홍길과의 대화였다.

2007.06.07 04:47 입력 / 2007.06.07 06:52 수정 

원문출처: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752146

 

 

20년째 이어온 `히말라야 인연` [중앙일보]

 

2007 로체, 로체샤르 남벽 원정대장 엄홍길씨

 

에베레스트 로체 원정대

1987년 1월 초순. 당시 나이 27살의 엄홍길은 ‘한국 크로니산악회 에베레스트 동계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 캠프4(해발 7800m)에서 캠프5로 이르는 루트를 개척하고 있었다. 1985년의 첫등반이 실패로 돌아간 뒤 두번째 도전이었다. 동행하던 셀파는 명성이 자자하던 ‘순다래’. 산소량이 해수면의 3분의 1에 불과한 해발 8000m이상의 데쓰 존(Death Zone)에서 정상공격조로 셀파와 함께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전진하던 엄홍길은 무전기를 통해 캠프3에서 캠프4로 이동하던 두 명의 셀파중 한 명이 추락해 사망했다는 다급한 교신을 듣는다. 산소통과 연료, 식량 등 조금전 엄홍길이 베이스캠프에 부탁했던 보급품을 나르던 셀파였다.

“사람이 죽었다. 보급품도 없다”

엄홍길은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베이스캠프로 내려가는 길. 캠프3에서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절벽을 내려가다 엄홍길은 눈위로 흩뿌려진 피와 배낭 등 사람이 추락한 흔적을 발견한다. 까마귀가 공중에 배회하고 있었다. 문득, 바위 한 구석에 끼어 있는 설상화 한 족을 보았다.

부러져 너덜너덜한 다리가 그대로 안에 신겨져 있을 것 같은 신발이었다. 순간 도무지 꼼짝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처음으로 겪는 산상에서의 죽음과 공포였다.

‘술딤 도르지’

이제 겨우 20살. 서글서글하고 잘생겼던 막내 셀파였다. 철수하는 대원들과 함께 술딤의 집이 있던 산간 마을 ‘팡보체’를 지나며 엄홍길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오열과 그 옆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술딤의 어린 부인을 보았다. 어머니의 슬픔도 가슴이 아픈 것이었지만,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어린 신부의 눈물은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겨우 4개월이 됐다고 했다.

신부의 나이는 당시 불과 15살이었다.


2000년 5월 엄홍길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무택과 함께 칸첸중가를 등정해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을 13개 등정한 세계적 산악인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000년 7월31일.마침내 하나 남은 K2를 등정함으로써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세계에서 8번째, 아시아에서 첫 번째’ 산악인이 되는 쾌거를 이룬다.

벅찬 감동속에 엄홍길은 그를 만들어 준 동료들을 생각했다. 무려 8명의 동료와 셀파들이 14좌 등반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1986년 에베레스트에서 '술딤 도르지' 셀파, 1993년 시샤팡마에서 박병태 대원, 1997년 안나푸르나에서 '나티' 셀파,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지현옥 대원과 ‘까뮈 도르지’ 셀파, 1999년 칸첸중가에서 한도규 대원과 KBS 현명근 기자, 그리고 2000년 칸첸중가에서 ‘다와따망’ 셀파까지.

“1986년 에베레스트와 술딤 도르지.... 그 잘 생기고 서글서글했던 청년....”

그 때, 팡보체 술딤의 집 앞에서 철수하는 대원들을 보며 아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술딤 도르지의 어린 신부가 엄홍길의 머리를 스쳤다.


2001년 로체샤르 원정대의 이끌고 다시 히말라야를 방문한 엄홍길은 1987년 사고당시 셀파들의 우두머리였던 ‘파상’을 만나 ‘어린 신부’의 소식을 묻는다. 무려 15년이 지났지만 생각해보니 그녀의 나이는 아직도 30살에 불과했다. 그녀의 이름도 그제서야 알았다. 신혼 4개월만에 남편을 산에 빼앗기고, 아직도 남편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는 야속한 산 밑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학파디기’였다. 그 때까지 그녀는 독신이었다. 베이스 캠프로 그녀를 불렀다. 먼길을 마다 않고 그녀가 기꺼이 달려왔다.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람이라 가슴에 묻어 둔 말이 많았음직 했지만 그녀는 먼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왜 재혼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엔

“아직도 남편 꿈을 꾼다. 일찍 죽은 남편이 너무 불쌍해 가슴이 아프다”며 고개를 떨궜다.

결혼 제의가 가끔 들어왔지만 아직도 재혼할 마음은 없다고 했다.감수성 많은 나이에 만난 남편 ‘술딤’이 신부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2001년 아는 사람을 따라 호주의 어느 집에서 서너 달 가정부 생활을 한 적이 있을 뿐, 태어나서 남편을 만난 동네를 그녀는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감자를 심고, 야크를 키우며...

자신이 주문한 장비를 운반하다 죽은 셀파의 어린 부인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비극앞에서 엄홍길은 어쩔 줄을 몰랐다.


15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진 2001년 로체샤르 원정이후, 2002년 월드컵 성공기원 에베레스트 등반, 2003년 로체샤르 등반, 2005년 ‘플랜 KOREA 히말라야 트레킹’, 2006년 세번째 로체샤르 등정에 이어 ‘2007 한국 로체샤르,로체 남벽 원정’에 이르기까지 엄대장은 꼬박꼬박 ‘학파디기’를 베이스캠프로 불러 일자리를 주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했지만 가끔 불러 일자리를 주는 것 외엔 엄홍길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엄홍길이 부르면 그녀도 기꺼이 달려왔다. 그녀에겐 대원들의 음식을 요리하는 '쿡 셀파' 보조 자리가 주어졌다. 현지에서 셀파라는 자리는 고임금의 직업이었다.

엄홍길의 소속사인 (주)트렉스타도 매달 일정액을 내 그녀를 돕고 있다.

이번 원정이 성공하면 산악인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이루게 될 엄홍길에게 물었다.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예전같은 원정은 무리일텐데... 학파디기는 어떻게 될까요?"

"걱정이네요. 저 여자는 저렇게 살다가 죽을겁니다. '히말라야 재단'을 만들어 등반중 사망한 유가족들을 돕는게 제 꿈입니다.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입에 풀 칠이라도 하도록 돕는거죠"

부엌에서 일하고 있던 학파디기를 찾아가 물었다.

"재혼 안해요?"

"안해요"

"엄대장도 이젠 예전처럼 자주 못 볼 텐데..."

"....."

"뭘 하고 싶으세요?"

"식당이요.그래야 저 분도 내 걱정을 덜지요"

로체=글.사진 김춘식 기자


[kimcs962@joongang.co.kr]   

2007.04.16 04:31 입력 / 2007.04.17 13:20 수정


 

박무택 *사망  

직업 : 산악인

출생일 : 1969년 6월 22일

사망일 : 2004년 5월 20일

학력 : 계명대학교

출 생 지 : 서울

화 제 :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6개를 등정한 산악인

  관련사항

약력 

1989년 추계 히말츄리(7,893m) 원정

1994년 춘계 탈레이 사가(6,904m) 원정

1996년 춘계 가샤브럼 2(8,068m) 등정

1997년 하계 난다다비 동봉(7,432m) 원정

2004년 초모랑마(Chomolangma; 에베레스트) (8,848m) 등정

2004년 에베레스트 도전 중 사망 

 

  수상경력


2005년 5월 체육훈장 맹호장 추서



엄홍길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서울에 올라와 2000년 5월까지 도봉산 자락에서 생활했다. 양주고등학교(현 양주시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해군에 입대해 UDT로 제대했다.


1985년 겨울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내디뎠다.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해 폐막식 날 지구의 꼭짓점을 밟았다. 2000년 여름 K2를 마지막으로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완등했다. 얄룽캉(2004)과 로체샤르 남벽(2007)을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16좌 완등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02년 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해 2006년 졸업했다. 체육훈장 거상장(1988), 맹호장(1996), 청룡장(2001)을 받았으며 상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 트렉스타 기술이사, 파고다 외국어학원 홍보이사, 기상청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엄홍길의 로체샤르 리더십 ``정상은 정복하는 게 아니다 `` 

 

                                        http://blog.joins.com/kimcs962/8142113 등록일 : 2007-06-15 04:03:16

  

산 사나이들은 산을 '정복'하지 않는다. 산은 '경외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정상에 올랐을 때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작은 거인'이 돌아왔다. 로체샤르(해발 8400m)에 올라 '14+2(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얄룽캉.로체샤르)'의 위업을 달성한 '2007 한국 로체샤르.로체 남벽 원정대(중앙일보. KT 후원, 신한은행.㈜트렉스타 협찬)'의 엄홍길 대장(47.트렉스타)이 14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했다. 3월 17일 출국한 지 석 달 만의 금의환향이다.


키 1m68㎝, 몸무게 56㎏의 이 사내에게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3개월을 함께 지내면서 옆에서 지켜본 그는 신뢰와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한국 정치현장과 비교해서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자연에 순응하라-싸워서 이기는 대상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연에 감사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늘 자연과 신에 감사하며 첫 숟가락의 음식을 나눴다. 맥주 한 잔을 마실 때도 몇 방울을 먼저 땅에 덜어냈다. 예전에 숨진 동료의 기일에는 잊지 않고 베이스캠프에 마련한 제단에 향을 피웠다. 산은 그의 정성을 외면하지 않고 몇 가지 기적으로 화답했다. 등반 초기 500m의 절벽에서 추락한 셰르파가 골절상만 입고 살아났고, 본격적인 몬순(폭우와 폭설을 동반하는 아라비아 계절풍)이 시작된 기간에 무려 8일간이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됐다. 일은 사람이 꾸미되 이루어짐은 하늘에 달렸다(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


▶행동하는 책임-감동은 충성으로 연결된다


그는 조직원들에 대한 무한책임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설맹(雪盲.눈에 반사된 햇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것)에 걸린 변성호 대원을 초속 45m의 강풍과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데리고 내려왔다(6월 2일자 3면).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함이었지만 끝까지 변 대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변 대원은 엄 대장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그는 2005년 '희망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에 올라 2년 전 등반 도중 숨진 동료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줬다. 20년 전 숨진 셰르파의 아내를 원정 때마다 찾아 일거리를 주고 챙겨주는 엄 대장(4월 16일자 27면)을 현지 셰르파들은 존경과 충성으로 받든다.


▶누구보다 정통하라-신뢰의 바탕이다


원정대원들은 장비.수송.식량.행정.기록의 역할을 분담했다. 엄 대장은 어떤 대원보다 변화에 정통했다. 매일 변화를 점검하며 고민하던 그는 캠프 3와 캠프 4에 비축됐어야 할 식량.부탄가스가 부족하다고 판단, 1차 등정 시도를 중단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셰르파를 동원해 부족한 물자를 수송했다. 일부 대원은 "시간이 없으니 (식량과 가스가) 약간 부족하더라도 등반을 계속하자"고 걱정을 섞어 건의했다. 그러자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엄 대장의 질책과 호통이 떨어졌다.


▶'히든카드'를 만들라-불가능이 가능해진다


히말라야에서 오후 3시 이후 정상 공격은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엄 대장은 오후 6시50분 정상에 올랐다. 일부 대원 사이에선 "엄 대장이 무모한 것 아니냐. 너무 고집이 세다"는 반발과 함께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그는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D데이로 잡은 5월 31일은 보름이었다. 히말라야의 보름달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밝다. 5월 중순께 정상에 오른다는 예정을 넘겼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보름달이라는 '히든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처에서는 올인하라


5월 중순 이후에는 폭설이 내려 등반 자체가 불가능한 히말라야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5월 31일 정상 도전의 기회를 얻은 엄 대장은 이 하루에 '올인'을 했다. 변성호.모상현 대원과 셰르파도 엄 대장을 믿고 함께 목숨을 걸었다. 다시 오지 않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일몰시간인 오후 6시50분 정상에 오른 것은 히말라야 등반사에 신화로 남을 기록이다. 히말라야에서는 산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산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던진 사람에게 정상을 허락했다.



김춘식 기자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kimcs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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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04:02 입력 / 2007.06.15 08:56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