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스크랩] 故 박무택 등반대장 시신수습

도깨비-1 2007. 6. 29. 18:37

★...손칠규 휴먼원정대장(右)이 롱북 베이스 캠프에서 29일 오후 고 박무택씨 시신수습 현장에 있는 엄홍길 등반대장과 무전으로 교신하고 있다

■▶ [자료출처 : http://news.joins.com]
故 박무택 등반대장 시신


★...엄홍길 등반 대장이 이끄는 휴먼원정대는 29일 故 박무택 대원이 누워있는 에베레스트 8천750m 지점에 도착,시신을 수습했다. MBC-TV촬영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 대원
지난해 5월 에베레스트 등반도중 엄홍길 대장(左)과 이야기하고있던 생전의 박무택 대원. 엄 대장은 이 등반길에 숨졌던 박무택,장민,백준호씨등 3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휴먼 등반'에 나서 29일 박씨의 시신을 찾아냈다. 


[자료출처 : http://eyenews.hankooki.com]
출처 : 故 박무택 등반대장 시신수습
글쓴이 : 목간한지26년 원글보기
메모 :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에서 초모랑마는 에베레스트산의 옛 명칭입니다.

지금의 에베레스트산의 이름은 식민지 시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지에서는 당시 티베트명인 '초모랑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초모랑마(Chomolungma)는,

'Chomo(여신)' + 'Lungma(세계)'가 합쳐진 단어로 '세계의 여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이름은 영국왕실지리학회가 전임 측량국 장관이었던 죠지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한 것(1865년)에 유래하고 있습니다.



제 목 [산 그리고 사람] 01 이승과 저승을 건너뛴 백준호



원문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3/h2006030117281475680.htm

 


이승과 저승을 건너뛴 백준호 - 심산 산악작가


뻔한 죽음의 길…미련곰탱이는 동료를 구하러 갔다

셰르파도 절레절레 포기한 에베레스트 최난 구간…

어둔 밤길 홀로 떨치고 올라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 본다

"형, 뭐하러 왔어?" "그러게, 근데 경치는 조~오타" 정상서 웃고 있는 그가 보인다.

 

 

산과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다. 산에 오르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간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 그리고 사람’은 그런 의도로 기획됐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요 몇 년 사이 네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산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과 등반을 떠올릴 때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존재론적 전율을 느끼고, 가슴이 쿵쾅대다 뜨겁게 달아오르며, 끝내는 목울대를 꿈틀대게 만들고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그는 백준호다.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가 유명 산악인이 아닌 까닭이다. 일반인들은 물론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의 이름은 귀에 설다. 나 역시 살아 생전 그를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지난 해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일원으로서 그의 시신을 수색하러 에베레스트에 다녀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모질고 힘겨웠던 취재과정에서 접하게 된 그의 삶과 등반은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활화산이 됐다.


‘백카스’와 ‘미련곰탱이’. 백준호의 동료 선후배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두주불사의 호쾌한 술꾼이어서 백카스요, 우직하기만 할뿐 도무지 요령 피울 줄 모른다 해서 미련곰탱이다. 백카스는 자신이 운영하던 갈비집을 언제나 산악인들로 북적이게 만들었지만 돈 챙기는 데는 영 재주가 없던 한심한 경영자였다.


미련곰탱이는 후배들에게 물려줘도 될 온갖 허드렛일을 앞장서 해치워버리고는 힘에 겨워 헉헉대는 답답한 사내였다. 그래서였다. 그의 동료와 선후배들은 그를 사랑했다. 앞뒤가 꽉 막힌 이 경상도 사나이는 오랫동안 벅찬 꿈을 하나 갖고 있었다.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이다.


2004년 5월18일 오후 3시. 그는 필생의 꿈에 바투 다가서 있었다. 정상 직전의 마지막 기지인 캠프5(8,300m)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비보에 접하고 만다. 그날 오전 10시에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했던 같은 원정대의 박무택이 조난을 당하고, 함께 올랐던 장민은 실종됐다는 소식이었다.



급히 베테랑 셰르파에게 구조작업을 지시했지만 허사였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며 되돌아 온 것이다. 당시 박무택이 설맹과 동상으로 인해 완전 탈진 상태에 빠진 채 쓰러져 있던 곳은 8,750m 지점. 그에게는 밤을 지새울 장비도 없었고, 산소통의 계기판은 이미 제로(0)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대로 놓아두면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했다. 여러분이 백준호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구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산을 아는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적어도 8,000m 이상을 올라가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무겁게 외로 튼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모두 정복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8,000m 이상의 히말라야를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그곳에서는 육체와 정신 모두 통제 범위의 바깥으로 내몰린다. 간단히 말해 제 정신으로 제 몸 하나 가누기조차 버겁다. 냉정하게 말해 그런 상황에서라면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왜? 조난자를 구조할 가능성이 0%이니까. 구조하러 나선 자마저 불귀의 객이 될 가능성이 100%이니까.


그런데 백준호는 갔다. 이 미련곰탱이는 이미 칼바람이 어둠을 가르는 영하 30도의 암흑천지 속으로 홀로 떨치고 일어나 올라갔다. 나는 이 남자의 결단이 무섭다. 그의 결단과 실행에 전율한다. 그 밤을 꼬박 새워 에베레스트의 최난 구간이라는 ‘세컨드스텝’(8,600m)을 오를 때 백준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넘겨짚어 볼 수 없는 경지다. 백준호는 이튿날 새벽 6시, 기어코 박무택과 조우한다. 이후 구조에 성공했는지, 생환에 성공했는지는 일단 접어두자. 그날 밤의 등반을 나는 감히 ‘한국 등반 사상 가장 의롭고 외로운 등반’이라 부르고 싶다. 그날 밤의 등반을 통하여 백준호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심연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2004년 5월19일 새벽 6시. 박무택을 만난 백준호는 전진베이스캠프의 원정대장과 무선교신을 나눈다.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구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다. 박무택의 시신은 이듬해인 2005년 5월29일 엄홍길이 이끈 휴먼원정대원들에 의해 수습됐다. 백준호는 실종됐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박무택의 시신 바로 아래 쪽에 덩그라니 놓여있던 백준호의 배낭뿐이다. 여기까지가 확인된 사실이다.


나는 이따금씩 그들이 나누었을 최후의 대화들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박무택은 백준호를 만나자마자 눈물부터 흘렸을 것이다. 홀로 세계의 지붕 끝에 버려진 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 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 아마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준호형, 누가 미련곰탱이 아니랄까봐…여기까지 뭐하러 올라왔어?” 백카스는 피식 웃는다. “그러게 말이다…여기서 널 보니까 술 생각이 나네… 야아, 경치 조오치? 그치? 이런 농담들을 나누면서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남겨진 지상 위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박무택이 젖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한다. “형, 평생 소원이 에베레스트 올라가는 거였잖아? 여기서 한 시간도 안 걸려…”


나는 상상한다. 나는 현장에 다녀온 산악작가로서, 그리고 캐릭터와 드라마를 다루는 시나리오작가로서, 그렇게 상상한다. 행여 이런 상상이 고인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려우면서도 가슴 뜨거워지는 상상은 어찌할 수 없다. 여기 구조는 커녕 생환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두 사나이가 있다. 박무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하지만 백준호에게는 아직 약간의 체력이 남아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백준호가 자신이 품어온 필생의 꿈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백준호는 끝내 박무택의 곁에 남아있기를 고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박무택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형, 올라갔다 와…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홀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 있는 백준호를 상상한다. 그에게는 배낭조차 없다. 산소통도, 카메라도, 피켈도, 깃발도 없다.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등정을 증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 지구라는 행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홀로 서서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망연히 굽어볼 뿐이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심연을 훌쩍 건너뛰고 필생의 꿈을 이룰 기회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친 자만이 머금을 수 있는 잔잔한 미소를.


백준호는…

백준호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대건고 재학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한 전문 산악인이다. 86년 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후 대학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의 산들을 쏘다녔다.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동아제약에서 근무하다 200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자로 나서면서 오랫동안 꿈꿔 왔던 히말라야 등반에 매달렸다.


2000년 초오유(8,201m), 2002년 로체(8,586m) 등반에 성공한 다음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정상 공격일을 하루 앞둔 2004년 5월18일, 같은 원정대의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이 조난을 당하자 홀로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그의 시신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찾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의 북측 베이스캠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향년 3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