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한국최고의 산악인

도깨비-1 2007. 6. 10. 14:18
 

한국최고의 산악인

 

 

산악인 김정섭의 3형제


슬프고도 안타가운 이야기

산악인 김정섭형제는 1971년 마나슬루봉(8163미터 세계7위봉) 첫 등반에서

동생 김기섭을 돌풍에 잃어버렸다

이듬해 김정섭 호섭 형제는 2년전 동생 기섭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나슬루에 재도전합니다만 7250미터 지점에서 대형 눈사태가 발생하여

동생 김기섭을 비롯하여 대원 5명과 10 명의 셰르파가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납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사고)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은 김정섭은 1976년 또다시 세 번째

마나술루에 도전합니다만 또다시 실패합니다.

왜? 그는 두 동생 을 차례로 잃어가면서 집념의 도전을 했을까요?


한으로 남은 김정섭의 마나슬루봉 도전은

1980년 동국대 산악부에 의하여 성공을 하게됩니다



고상돈
<1948∼1979. 제주도 출생>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날아온 고상돈의 메시지는 전 국민을 열광하게 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의 지붕에 올라선 순간이었다.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움라기봉 정찰등반이후

2003년 까지 한국의 원정대는 457개팀 3421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하여

8000미터급 14좌 완등자 3명(엄홍길 박영석 한완용)

1977년 고상돈의 쾌거에 이어

1987년 허영호가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86명의 산악대원의 시신이 히말라야에 묻혔답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매청 청주 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했다.
대학산악연맹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대표로 참가,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해발 8,848m)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고, 포스트·몬순 기간의 등정으로는 세계 세번째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후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해발 6,191m)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했다.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이일교·박훈규와 함께 5월 29일 하산 도중 자일사고로 추락, 사망했다. 제주도의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으며 고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Daum백과]


허영호

 1954. 4. 16, 충북 제천


1987년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등반가라기보다는 탐험가에 가깝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에는 남극점 북극점을 차례로 밟았고

91년도에는 7대륙 최고봉과 지구의 3극점을 모두 올라서

세계3번째로 어드벤처 그랜드 슬램의 대기록을 세웠다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8년 한국 산악회 안나푸르나 4봉 훈련대원으로 참여했고, 1982년 세계 제5위 봉인 마칼루 등정, 1983년 마나슬루 무산소 단독 등정, 1985년 투쿠체 등정, 1986년 타우체 등정, 알프스 3대 북벽 등정 등 국내 산악인 중 높이 8,000m 이상의 고봉을 가장 많이 등정한 산악인이 되었다. 1987년 한국인으로서는 2번째, 동계 등정으로는 3번째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BR>1989년 아시아 로체, 1992년 남아메리카 아콩카과, 북아메리카 매킨리,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다. 199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1995년 북극대륙 도보횡단에 성공, 1995년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에 올랐다. [Daum백과]


산악인 엄홍길

(嚴弘吉, 1960년 9월 14일 ~ )


한국 산악계의 계보를 따지면

고상돈 허영호에 이어서 엄홍길을 꼽지요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28번 도전 끝에 상공했기에 거의 절반은 실패했다오.

특히 안나푸르나 등정은 다섯 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안나푸르나봉 도전 시에 지현옥을 잃었다)

무명 산악인 엄홍길의 이름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맞추어 기획한 이벤트중

에베레스트(8848미터)와 로체(8516미터) 동시 등정에 참가하여

엄홍길은 에베레스트를 밟으므로 유명해진다

그전 엄홍길은 85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으나 7500미터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고

또다시 86년 또다시 도전했으나 8600미터 지점에서 좌절하고야 만다

엄홍길은 경남 고성출신으로 나이 겨우 3세 때 의정부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에

도봉산 자락에서 매점을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도봉산을 놀이터로 자랍니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등을 누비면서

산악인으로의 길을 갑니다만

산악인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않은 무명 산악인에 불과했지요.

키는 167센치 체중 66키로 정도의 보통체구이지만 체력은 좋았다

동두천의 양주고를 졸업한 뒤에 해군특수부대 udt를 제대한 후에

그를 유심히 본 산악인 어느 선배가 85년 에베레스트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해외 원정 산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88년도에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에도 --

이후 92년도 까지 6번이나 에베레스트의 봉우리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93년도에 2주간 사이에 희말라야의 초오유봉(8021) 사사팡마봉(8021)

연속등정에 성공하였고

이듬해부터 브로드피크(8047) 로체(8516) 다울라기리(8167) 마나슬로(8163)을

차레로 정복하였다


엄홍길을 가장 힘들게 했던 정상은 안나푸르나였다

89년 첫 도전 실패 이후 꼭 10년이 소요되었다

97년 세 번째 도전에서 셰르파가 크레파스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를-

그리고 98년 안나푸르나 네 번째 도전에서 7700미터 지점에서 셰르파가 빙벽으로 추락했다

추락한 셰르파를 구하려던 엄홍길은 로프에 발목이 걸려 180도로 뒤틀리고

2박3일 동안 거의 기다시피 켐프로 기적 같은 상황에서 내려와 헬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재기가 불가능 하다던 엄홍길은 1년 뒤 1999년 안나푸르나에 또다시 도전한다.

10년 동안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기어이 성공했으나

동행한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이곳에서 잃어버린다.

(지현옥의 추모비가 조령산에 있었지요)


그리고 2000년 7/31일 k2(8611미터)에 오르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 8번째

14좌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이 되었다

엄홍길은 그동안 28번 도전하여 드디어 대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의 시신을 희말라야의 산속에다 묻었다

그중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박주훈 황선덕 한명근 등 전문 산악인의 시신을 히말라야의

얼음과 눈의 산에다 묻었고

셰르파 술염도로지 나티 카미도로미 앙다와다망도 희말리아의 산에서 보내야만 했다

엄홍길은 등반도중 시체마자 잃어버린 동료대원 박무택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영하30도의 강추위속에서 비박을 해가며 결국 시신을 찾아서 묻어주는

초모랑마 휴먼 원정도 성공했다

14좌 등정이후 2004년 알룽캉(8505)에 오르고

16좌인 로체사르에 2007년 5월 31일 4번째 도전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수많은 죽음을 담보로 오늘의 영광을 쟁취한 운이 좋으면서 한편으로 비운의 산악 왕.

로체샤르는 히말라야 산맥중에서도 등정이 가장 어려운 산맥으로 엄홍길은 2001년 첫 도전에 실패했으며 2003년 도전에서 정상을 150미터 앞두고 판상 눈사태가 일어나 동료 두 명을 잃었다. 2006년에 3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에서 로체샤르 남벽을 통해 등정했다.



박영석


(朴英碩, 1963년 11월 2일 ~ 2011년 10월 18일

엄홍길과 함께 한국등반계의 양대 거봉인 박영석

1993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도전 4번 만에 성공한 것이다

91년 첫 에베레스트 도전 시에는 얼굴이 함몰되어 헬기로 이송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97년 한 해 동안 8000미터 급 5개를 등정했고

2001년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그리고 14좌 완등 후엔 극점으로 시야를 돌려서

산악 그랜드 슬램 (14좌완등 +7대륙 최고봉+남북극점)을 달성했다

박영석(朴英碩, 1963년 11월 2일 ~ 2011년 10월)은 대한민국의 산악인이다. 2005년 4월 30일(한국시간 기준: 5월 1일)에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Explorers Grand Slam)을 달성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최초, 세계에서 8번째로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14좌를 완등(세계 최단기간)한 산악인이기도 하다. 2011년 10월 20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 된 후 2명의 대원과 함께 소식이 끊겼다. 이후 대한산악연맹을 중심으로 두 차례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 거대한 눈사태에 휘말려 5,600~5,700미터 빙하지대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수색을 중단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남극점·북극점 원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산악인이다. 1988년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른 뒤 1991년 에베레스트산 남서벽에 올랐고,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6개월 만에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6개를 등정했다. 2001년 히말라야 14좌를 8년 2개월 만에 모두 등정해 세계 최단기간 완등 기록을 세웠다.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했고,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뚫었다.

2011년 박영석은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를 개발하는 도중 10월 18일 남벽 5,800m 부근에서 마지막 교신을 남긴 채 연락이 끊겼으며, 수색·구조작업을 진행했지만 찾지 못했다. [Daum백과]


한왕용 (1966년 9월~ )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를 세계에서 11번째, 국내에서 3번째로 완등한 대한민국 산악인이다

2003년 한국인으로 세 번째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한 한왕용은

엄홍길이나 박영석 만큼은 주목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한왕용은 14좌 등정 내내 단 한명의 대원도 잃지를 않았다

물론 몇 번은 엄홍길을 대장으로 몇 번은 박영석을 대장으로 한 대원신분으로

참가하여 대장으로의 기회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2002년 k2(8611)등반 때에는 산소통이 고장 난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양보하고 무산소 등정을 했다

14좌 완등 후 지금은 그의 등반대원들이 히말라야에 남기고 온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등반대를 꾸려 에베레스트, k2 ,마나슬루 등을 찾고 있다



■ 백준호


백준호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대건고 재학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한 전문 산악인이다. 86년 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후 대학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의 산들을 쏘다녔다.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동아제약에서 근무하다 200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자로 나서면서 오랫동안 꿈꿔 왔던 히말라야 등반에 매달렸다.


2000년 초오유(8,201m), 2002년 로체(8,586m) 등반에 성공한 다음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정상 공격일을 하루 앞둔 2004년 5월18일, 같은 원정대의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이 조난을 당하자 홀로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그의 시신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찾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의 북측 베이스캠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향년 37세.

모교 지키는 국내 첫 산악 의사자 백준호 

- 대구 대건중고에 흉상 세워

입력 : 2016-10-11 23:06

국내 첫 산악 의사자인 고 백준호 산악인의 흉상이 그의 모교 대구 대건중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
백준호 산악인은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나섰다가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 대원이 조난당하자 위험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구조에 나섰다. 당시 모든 산악인이 구조요청을 외면했었다. 
백준호는 악천후 속에서 12시간 산행 끝에 박무택 대원을 발견, 안전 조치한 후 박 대원이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켰고 
그도 결국 그곳에서 숨졌다.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휴먼등반대를 영화화해 1000만 관객이 든 ‘히말라야’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백준호 산악인은 2005년 체육훈장 백마장 수상과 함께 산악인 최초 의사자로 인정되었다.

흉상 제막식은 지난 9일에 있었다. [출처: 서울신문]


지현옥


93년 한국여성 등반대 대장으로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

그녀는 1999년 엄홍길과 함께한 안나푸르나 등정 하산 길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지현옥 대원은 실종되었다



오은선

[{오은선(1966년 3월 5일 ~ )은 대한민국산악인으로 블랙야크 소속이다.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은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이다]

불의의 사고로 떠난 지현옥의 빈자리는 오은선이 채웠다

그녀는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등정에 성공한

첫 한국 여성등반가가 되었다

.

1993년 故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최초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으로 첫 해외 원정 시작.

그로부터 11년 후인 2004년 한국,아시아 여성산악인 최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단독 등정 성공.
2006년 한국 여성 산악인 최초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으며, 현재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최고봉을 11개봉을 오른 세계적인 여성산악인이다.

2008년 세계 여성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중 한 해 4개봉 연속 등정에 성공(마칼루(8,463m)-로체(8,516m)-브로드피크(8,047m)-마나슬루(8,163m))했다.


◈ 7대륙 최고봉 한국 여성 최초 등정

2002. 8. 24. 유럽 최고봉 엘브르즈(5,642m) - 동봉(23일), 서봉(24일)

2003. 5. 24.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아시아 여성 최초‘단독 등정’

2004. 1. 9.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2004. 5. 20. 세계(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여성 최초‘단독 등정’

2004. 8. 19.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2004. 11. 12. 호주 최고봉 코지어스코(2,230m)

2004. 12. 19.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2006. 12. 3. 오세아니아주 최고봉 칼스텐츠(4,884m)


◈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중 11개봉 등정 (한국.아시아 최초)

1997. 7. 17. 가셔브롬 II봉(8,035m) 무산소

2004. 5. 20. 세계(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여성 최초 단독 등정

2006. 10. 13. 시샤팡마(8,046m) 무산소

2007. 5. 8. 초오유(8,201m) 무산소, 단독

2007. 7. 20. K2(8,611m) 한국 여성 최초 등정

2008. 5. 13. 마칼루(8,463m) 무산소

2008. 5. 26. 로체(8,516m) 무산소, 단독

2008. 7. 31. 브로드피크(8,047m) 무산소, 단독

2008. 10. 12. 마나슬루(8,163m) 무산소

  ※ 2008년,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중 한해 4개봉 연속 등정 성공

2009. 5. 6. 칸첸중가(8,586m) 무산소

2009. 5. 21. 다울라기리(8,167m) 무산소

2009. 7. 10. 낭가파르밧(8,126m) 무산소


고미영(高美英)


생몰 : 1967년 7월 3일 ~ 2009년 7월

(지난 7월 11일 여성 산악인 최초 14좌 완등을 목표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6m) 정상을 등정했다

3좌만을 남겨두고 하산도중 실족사고로 숨짐)

대한민국 전북 부안 출생의 산악인이다. 작은 체구임에도 2007년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8,000 미터급 산 3개 등정에 성공하는 등 대한민국 내 여성 산악인의 대표주자로 꼽혀 왔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10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산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2009년에만 4개 봉우리를 오르는 등 총 11좌 등정에 성공했다. 다음날 11일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해발 6,200 미터 지점 '칼날 능선'에서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다.[1] 그녀가 추락한 장소는 눈사태와 낙석이 자주 발생하여 대원들끼리 로프로 몸을 묶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2]

그는 사고 직전까지 또다른 산악인인 오은선과 함께 8,000 미터급 14좌 등정 기록을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그런데 둘 사이의 과도한 경쟁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1]

소속 :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학력 : 상명대학교 체육학과 석사과정
경력 : 2009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
수상 : 2006년 제2회 노스페이스 아이스 클라이밍 페스티벌 여자부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