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인생, 누군가 속삭인다.
“만일 내일 인생이 끝난다면?” 정신이 번쩍 든다.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삶의 무게는 천근만근,
우리 삶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기관차 같다.
큰 숨을 쉬고 눈을 돌려보자. 역사가, 문화가 내 옆에 있다.
이전 세대의 나, 다른 공간의 내가 호흡했던 숨결이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치열한 삶의 체취가 물씬 느껴지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으로 떠나자.
더 늦게 전에…
선조들의 치열한 삶의 정신이 녹아 있는, 이야기와 전설이 어우러진 유적지 10곳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소개한다.》
○선비의 기품과 단종의 애조(哀調)가…
해질 녘 방문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의 만대루. 1572년 서애 유성룡 선생이 글을 쓰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노을 질 무렵, 복례문(입구)을 지나 만대루(유림들이 앉아 시를 읊던 곳) 밑을 지나쳐 서원 중앙에 있는 입교당(교실) 마루에 걸터앉는다.
만대루 기둥 너머 보이는 옥빛 낙동강과 그 뒤에 있는 병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햇살을 받은 병산은 산 굽이굽이 빛이 교차하면서 한 폭의 병풍이 된다.
홍매나무, 무궁화나무, 청매나무, 350년 된 목백일홍이 어우러진 사원은 금세라도 유림들이 걸어나올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든다. 미술사학자들이 한국 최고의 서원으로 꼽는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인공 건축물이 아닌, 자연의 숲 같다. 건축구조 속 기둥은 휘어지면 휘어진 대로, 곧으면 곧은 대로, 나무 모양 그대로 사용해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기둥 주춧돌까지도 자연석을 깎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고 서원 전체가 단청을 입히지 않은 나무 색 그대로여서 서애의 손때를 느낄 수 있다. 24년간 이곳을 지킨 류시석(50) 씨에게 커피 한잔 얻어먹는 건 덤.
‘슬픈 왕자’ 단종의 비사(悲史)와 전설이 얽힌 강원 영월군 청령포. 1452년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유배된 곳이다.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강이고 남쪽이 절벽인 천혜의 유배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치가 오히려 슬픈 비극과 부조화를 이룬다. 사약을 받고 단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관풍헌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소나무인 관음송(수령 600년·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듣고(音), 비참한 모습을 봤다고(觀)해서 생긴 이름)이 쓸쓸히 서 있다.
○천년 문화재의 보고(寶庫)
불국토(佛國土)가 따로 없다. 천 길 물줄기를 한꺼번에 절벽 아래로 쏟아내듯 경주 남산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에는 100여 곳의 절터, 60여 의 석불, 40여 기의 탑이 있다. 순례길만 70여 곳.
삼릉골로 올라가 용장골을 거쳐 칠불암으로 내려오는 산길이 전문가들의 추천 코스. 남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 상선암에 있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의 살진 두 뺨과 입 언저리는 친숙한 신라인의 미소 그 자체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일본 사람들까지 경주 남산을 불국토라고 생각한다”며 “신라는 불교를 통일의 원천으로 삼았으며 석굴암, 불국사 등 절정의 예술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천년고토의 유물에 관심이 끌린다면 백제의 불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을 찾아가자. 6세기 말 제작된 두 불상은 한국 최초의 마애불이자 백제의 은은한 미소를 담고 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불상은 정면만이 아니라 빙 돌아가면서 봐야 조각 자체가 뛰어난 걸 알 수 있다. 또 같은 불상의 표정을 한 사람은 미소로 보지만 다른 사람은 울음으로 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노래를 퍼뜨린 서동(백제 무왕)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은 사랑을 이룬 뒤 미륵산 앞을 지나다 연못에서 미륵불을 보고 이곳에 미륵사를 세웠다. 전문가들의 추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 때문. 동탑은 조선시대 완전히 무너져 없어졌다가 1993년 화강암으로 복원됐다. 20세기 동탑과 1000년 전 서탑의 대비가 묘하다.
기울어져 가던 조선조 후기 동시대를 살면서 당쟁을 혁파하고 부국강병의 같은 꿈을 염원했던 군신(君臣) 정조와 다산 정약용. 두 사람에 얽힌 수원 화성과 다산초당은 그들의 ‘꿈’(수원 화성)과 ‘좌절’(다산초당)을 상징한다.
정조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건축물이자 다산의 실사구시적 건축기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수원시 장안구 수원 화성은 화강암이 아닌 전돌(얇은 돌)로 성곽을 쌓아 경고하면서도 실용미가 돋보이는 조선 후기의 걸작.
정약용이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 이후)에 연루되어 58세까지 무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다산초당. 그곳에 가면 목민심서를 쓰고 화성 행궁을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던 다산의 나라 사랑과 한(恨)이 서리서리 녹아 있다.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주변 다산사경으로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백련사 주변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도 한 번에 둘러보자.
○민족 기상의 유산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한반도에도 원시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기하학적 무늬와 고래, 상어, 사슴, 반인반수 등의 이미지가, 대곡천 하류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성기, 고래 잡는 사람, 함정에 빠진 호랑이 등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 속 사냥꾼의 역동성은 ‘불멸의 이순신’의 기백으로 계승된다. 충무공 유적지인 경남 통영시 한산도 제승당은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장군이 한산도 본영을 세운 곳. 유람선을 타고 한산도에 이르는 길, 한산도 나루터에서 제승당으로 향하는 해안길의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불멸’의 꿈을 잃어버린 왕국도 추천됐다. 사라진 왕국 대가야의 비밀이 잠든 경북 고령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5세기 전후 대가야 왕족들의 무덤 수백 기가 있다. 꼭 봐야 할 유물은 5세기 후반 조성된 44호분. 국내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 고분으로 대형 석실 3개, 소형 석곽 32개로 이루어졌으며 36명의 인골이 발굴된 곳이다.
○ 해학의 유산
추사 김정희의 생가인 추사고택과 해남 윤씨의 녹우당.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김정희의 생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고택은 예술가의 숭고한 혼이 담긴 공간.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종으로 남도 명문 해남 윤씨 윤선도 윤두서의 종가인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 앞 높이 30m 은행나무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녹우당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최고 명작 윤두서의 ‘자화상’을 꼭 챙겨 볼 것.
글=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자문에 응해 준 분들
고은기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성구 국립 경주박물관, 김우림 서울역사박물관장, 신광섭 민속박물관장, 신영훈 한옥문화원장,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태호 명지대학교 교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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