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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2019년 01월-안동호반자연휴양림-유학의 향기 찾아

도깨비-1 2019. 1. 4. 10:37
  년말이라 고향 산소 갈 일(고향 산소는 "스마트팝" 사업구역에서 제외되어 다행이 묘역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가족여행으로 유학의 향기 찾아 안동 일원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하회마을은 자주 갔더랬는데~
군자마을, 도산서원쪽은 어떻게 하다보니 처음입니다.

 

 

 * 천하의 파락호 김용환

  김용환은 하라는 입신양명은 팽개치고 밤이면 투전판을 들락이며 돈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독립운동을 하고서 구속된 적이 있기에 하다 말겠지 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13대 종손이 된 그때 학봉 문중 땅은 13만 평이요 재산은 지금 시가로 230억원이었다. 이 문중 재산을 야금야금 노름판에 털어 넣고 그도 모자라 사당에 모셔뒀던 신줏단지까지 세 번이나 팔아치웠다.

 판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마지막 판에는 김용환 패거리가 끼어들었다.

 김용환이 "내가 이겼다"고 고함지르며 돈을 쓸어담으면 패거리가 몽둥이를 들고 판돈을 자루에 넣고 사라지곤 했다. 시집간 고명딸이 가져온 장롱 살 돈도 판돈으로 사라졌다.

 남을 믿지 못하여 하인이 손님 밥상을 가져오면 대청마루로 직접 나와서 상을 받았고, 한여름에도 화롯불을 켜놓고 주판알을 튀기다가 정체불명의 문서를 태워 인멸하는 일을 일삼았다. 문중 그 누구도 감히 얼굴을 들고 안동 땅을 걷지 못하였다.

반신반의한 건국훈장

해방이 되고 이듬해 김용환이 죽었다. 평생 동지 하중환이 물었다. "다 털어놓으시게." 김용환이 말했다. "그러지 마소. 당연한 일이거늘, 누가 믿을까." 죽기 전 김용환은 자신에 관한 일체 기록을 소각해버렸다. 

  입을 다물겠다는 언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8년 김용환의 탈상 때,  하중환이 약속을 어기고 상세한 이력을 쓴 제문(祭文)을 읽었다. 그제야 이 망나니의 정체가 밝혀지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노름판에서 사라진 돈, 신줏단지 팔아 그러모은 돈, 문중 전답 팔아서 해 처먹은 돈은 몽땅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것이다.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힌 문중 장손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파락호 시늉밖에 없었고, 김용환은 문중 재산을 팔아먹었다는 불명예를 죽을 때까지 감수한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199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이 파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때 고명딸 김후웅이 조카인 15대손 김종길 형제에게 이리 읊었다. 

"종길 형제 보아라. 철없는 외동딸 무식한 이 여식이, 누구 앞에서도 떳떳이 우리 아배 변명 한 번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럽다.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농 사오라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삼천리 금수강산 내 나라를 찾았어도 우리 아배 지난 이력 자랑 한 번 아니하매, 영문을 알지 못해 팔십 평생 살다 보니 이런 영광 보는구나, 자랑스런 우리 아배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김종길이 말했다. "할아버지 행적의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가야 될 텐데, 부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현재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15대손 김종길(金鍾吉·77)이 말했다. "전쟁 때 호남 의병장 고경명이 '학봉 댁에 가면 거둬줄 것'이라며 자식 하나를 우리 집에 보냈다. 그리고 400년 뒤 내가 종손이 된 뒤 고경명 선생 13대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덕분에 가문이 이어졌다고."
 종택 정원에는 그 후손이 심은 나무가 서 있다.


* 왜 안동이 선비의 고장인가. 도산서원이, 병산서원이, 하회마을이 있고 학봉 종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곳을 거쳐 간 선비들이 남긴 흔적에 선비 정신이 진하게 배어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학봉 가문에 독립유공자가 17명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손자까지 독립유공자 9명이 고성 이씨 고택 임청각에서 나왔다.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퇴계 이황 문중 하계파 후손도 25명이 독립지사였다.
14대 후손 이육사는 시인이기에 앞서 권총술과 수류탄 제조에 능한 독립투사였다.
무실마을 전주 류씨 가문도 16명이 나왔다.


이들이 바로 선비다.
보아라, 이들이 안동이다.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歷史] 파락호 핏줄 속에는 선비의 기개가 흘렀다. [66] 파락호 김용환과 학봉 김성일 종택이 있는 안동"에서 인용.

 



★12월30일(일)★
부산-230km(3시간)-안동 군자마을-유교문화 박물관-안동호반자연휴양림

 


★12월31일(월)★
휴양림-4km(10분)-도산서원(1시간)-4km(10분)-퇴계종택-이육사 문학관(1시간)-6km(10분)
-몽실식당(중식-1시간)
-11km(25분)-농암종택(30분)
-2km(10분)-고산정-7km(20분)-청량사(1시간30분)-19km(25분)-휴양림

 


★01월01일(화)★
휴양림출발-30km(40분)-봉정사(1시간)-10km(15분)-학봉종택-66km(1시간20분)-상주 (산소)-214km(2시간40분)-부산

 

★ 학봉종택: www.hakbong.co.kr, (054)852-2087, 고택 체험 가능

 

 

안동 군자마을

 

군자마을-조선옥(한옥)의 졸박함.

도산서당

 

 

도산서원 전경

 

 

서원앞쪽-안동호

 

 

 

퇴계선생 종택

 

이육사문학관 - 월요일이라 휴관~ㅠ~

껍데기만 보고 왔어요.

 

농암 이현보선생 종택

 

농암종택 내 별당- 긍구당

 

농암종택 가는 길 - 강 건너 고산정(낙동강변)

 

고산정-앞 풍광이 좋아 저절로 시가(詩歌)가 나왔을듯~

 

청량산 청량사

 

 

 

 

청량사 경내-유리보전(약사여래(藥師如來)을 봉안한 사찰의 전각)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의 준말이다. 원효스님이 창건한 사찰.

 

 

 

봉정사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 내부 목재 결구

 

봉정사-대웅전 측면

 

 

 의성김씨학봉종택-솟을 대문

 

학봉 김성일 선생 종택- 전경

- 마당을 잔디밭으로 잘 가꿔 놓았습니다.

 

학봉종택 - 한옥체험(숙박)을 할 수 있습니다.

 

학봉기년관 내 - 진주성(진주대첩)관련 기록

*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은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거병을 독려하고 관군과의 연계작전을 도모하여 김시민의 진주대첩을 가능케 함.

 

 

 

안동호반자연휴양림 사용후기

-숲속의 집(원앙방) 기준

 

8인실(1층 4인, 다락방 4인)이나, 아침 화장실 볼 일 보는 사람과 샤워(씻고)하는 것 등을 고려했을 때,

화장실(샤워겸용)이 매우 작고, 1개소뿐이라 성인 8인 사용은 무리일 듯.

성인 4인정도가 최대일 듯.

 

전체적으로 양호하고, 앞쪽 안동호를 감상할 수 있어 풍광도 좋음.

주방이 독립되어 있어 사용 편리하고, 난방도 양호.

 

다만, 냉장고 위치랑 씽크대 위치가 반대로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건축 설계자의 세심한 검토, 안목이 아쉬운 부분.

 

화장실이 좁아 불편, 화장실 환기창이 큰 것까지는 좋은데 변기랑 가깝게 설치되어 있어 밖에서 안이 보이는 단점과 창문 때문에 휴지걸이가 변기 뒷부분에 설치되어 사용이 불편함.

 

건물 전체적으로-이중창 내 외부 모두를 투명유리로 사용한 치명적 실수(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임)가 있고, 1층 거실 전면 창이 창호가 좌우 뒤집어 설치하여 이중창 바깥쪽 창호 잠금 쇠를 겨우 잠그고 열 수 있음

-명백한 시공 혹은 설계 오류 - 건축하는 사람들 모두 욕먹게 할 만한 어처구니없는 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