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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 무장사지, 무장봉

도깨비-1 2018. 5. 6. 15:27


5월 5일(토) 어린이날부터 3일 연휴, 집에서만 뒹구는 것은 범죄(?)행위란 생각이 들어 오래 벼려온 무장사지, 무장봉 산행을 감행 했지요.  
 
유홍준이 '문유답'에서 너무 거창하게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명실공히 통일전쟁을 마무리했을 때, 문무왕은 전시비상체제를 해제하는 뜻으로 투구를 여기에 묻고 절을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이것이 곧 ‘군사문화의 폐기처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한 것 때문에  대단한(?) 뭔가가 있을 것으로 상상해왔었다.  
 
 아무튼 기대가 큰 탓이었을까, 절터는 살짝 실망스러웠다. 부서진 석비[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慶州鍪藏寺址阿彌陀佛造像事蹟碑)]와 삼층석탑(鍪藏寺址 三層石塔)이 전부다.  
 
절터라기엔 좁고, 석탑의 위치 또한 ‘왜 여기지?’ 할 만큼 절터 아래 낮은 쪽에 서 있다. 절터 자체가 북서쪽의 경사면이고, 절터 축이 서향으로 배치된 형태인 듯싶은데, 당시에는 서쪽 낮은 곳에서 진입했기 때문에 탑부터 예배하라는 의도 이었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물(금당)의 향은 어디로 했을까 등 건축적 의문 외에, 문무왕은 왜 왕궁에서 이 먼 곳까지 와서 굳이 투구를 묻었으며, 절은 왜 세워야 했을까 등 등. 여러 의문이 넘쳤다.
해서, 이것 저것 자료를 검색해보니 조금 의문이 풀린다. 덕분에 공부 좀 했다.  
 
유홍준은 "문무왕이 투구를 묻고 절을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보다 100 여년 뒤인 원성왕때 절이 세워졌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신라 38대 원성왕 시절, 그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 17관등 중 4번째 관등)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창건했다고 하고, 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태종(太宗, 태종무열왕 재위, 645-661)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 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김춘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9대 재위 654-661년)과 그의 아들 문무왕(文武王 30대, 재위 661∼681년)이 삼국 통일을 이루고, 전쟁후의 그 많은 병장기들을 처분(?)하기 어려워 ‘암곡’이라 불리는 이 외지고 깊숙한 골짜기에 감추어 보관하지 않았을까. (반란세력들에게 병장기가 탈취되면 안 되니까)
그리고 100여년이 지난 뒤 사실상 무력(쿠데타)으로  무열왕계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원성왕(元聖王, 38대, 재위: 785~798년)때 그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창건했다고 하나 군벌세력이었던 그들이 천연요새이자 무기고나 다름없는 이곳을 관리할 목적으로 절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 
 
원성왕은 혜공왕(惠恭王, 36대 재위: 765~780년)때 ‘이찬(伊飡)’ 관직에 있었으며, 상대등(上大等) ‘김양상’(후에 37대 선덕왕)과 ‘김지정의 난’을 진압(사실상 혜공왕 제거) 하고 실권을 장악한 군부세력 아니든가.  
 
이런 사실(?)들로 보면 유홍준은 ‘문유답‘에서 '무장사'란 이름에 취해 감성적으로 너무 나아간 듯하다.  사실은 이곳이 '군사문화의 폐기' 장소가 아니라 군벌세력의 치열한 각축장. 암투장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겠다 싶어 무장봉까지 산행은 마치고 내려왔다.
주차장부터 왕복 12~13km정도. 4시간 가까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엔 감포 감은사지 들러 동경주IC로 내려왔으나, 이게 패착이었다.
해운대 요금소부터 악성정체. 집까지 1시간은 더 걸린듯 하다. 주말-휴일과 출퇴근 시간대 해운대 근처는 얼씬도 말아야 했는데~
에휴~~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인 문무왕을 추모하여 세운 절"이라고 안내하고 있으나

 문무왕은 원성왕 다시보다 100여년전의 인물이고, 삼국유사에는 "원성왕(元聖王, 38대, 재위: 785~798년)때 그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창건했다"고 나온다.

   안내문이 잘못 된건가???


 





























 * 김지정의 난(金志貞)은 선덕왕 1(780) 신라의 왕족 김지정(? ~ 780)이 일으킨 반란으로서, 신라 후기에 연달아 일어난 왕위쟁탈을 위한 골육상쟁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려서 왕위에 오른 혜공왕은 사치와 방탕이 심하여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에 이찬(李飡)이던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궁궐을 포위하고 왕과 왕비를 죽였으나, 반란은 상대등 김양상(金良相), 이찬 김경신(金敬信) 등의 반격으로 평정되고, 왕위는 김양상이 계승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 안에 큰 난리가 생기고, 혜공왕은 김양상, 김경신에게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김지정의 난이 혜공왕이 아니라 당시 실권을 잡은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을 겨냥하여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혜공왕과 김지정이 모두 죽고 김양상이 즉위(선덕왕)했다는 학계의 해석도 있다.

 

혜공왕,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죽었으며, 무열왕계 후손이 옹립되지 않고 당시 상대등 김양상이 스스로 즉위하여 왕(선덕왕)이 되었고, 훗날 그가 후손없이 죽자 김주원과 김경신이 싸웠다. 결국 김양상의 일파 김경신이 왕(원성왕)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780년에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혜공왕이 난의 과정에서 살해당했다고 하였는데, 시해한 인물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야사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이 김양상(37대 선덕왕), 김경신(38대 원성왕)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武烈王係)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3 탑상4 무장사미타전(鍪藏寺彌陀殿)> 기록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아버지 효양(孝讓)이 그의 숙부 파진찬(波珍飡, 17관등 중 4번째 관등)을 추모하여 무장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또한 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태종(太宗, 태종무열왕 재위, 645-661)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안에 감추어서, 그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장사 위쪽에 있었던 아미타(彌陀)를 모신 옛 불전인 미타전(彌陀殿)에 대해서는,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의 비()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왕이 먼저 죽은 것을 슬퍼하여 6(六衣)의 성대한 복장을 희사하고 9(九府)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모두 내어 이름난 장인을 불러 아미타상(彌陀) 한구를 만들고 아울러 여러 신중(神衆)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부연되어 있다.

 

이밖에 무장사와 관련된 기록은 다른 사료에서도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21 경주(慶州) 불우조(佛宇條)에서는 무장사(鍪藏寺)는 부()의 동북쪽 30,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 비석이 있다.” 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영조(英祖, 재위 1725-1776)때의 문신인 홍양호(洪良浩, 1724-1782)가 지은 이계집(耳溪集)16 제무장사비(題鍪藏寺碑)조에서 그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때 무장사에 김생(金生, 711-?)이 글을 쓴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재를 알지 못한다. 사람을 보내 비가 있던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산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작은 난야(蘭若, 사찰)를 찾아냈다. 승려의 말로는 무장사의 옛터인데 고전(古傳)에 의하면 신라여주(新羅女主)가 병기를 이곳에 감추었다고 하나 비는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무장사에 대해 무장사는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이 파진찬의 관등을 가진 숙부를 위해 세운 것으로 이후 원성왕 가문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곽승훈, 1994) 또한 무장사의 위치가 험준한 곳에 있는 것에 주목하여 다른 귀족들의 간섭을 물리치기 위함과, 유사시에 군사상에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보며, 무장사란 이름의 유래를 통해 원성왕 가문이 어느 정도의 군력을 소유했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곽승훈, 1995)

 

한편 무장사의 이름 유래에 대해 전하는 세 기록은 병기를 감춘 주체를 태종, 고려 태조, 신라여주로 각각 다르게 전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 이계집(耳溪集)의 기록은 무장사가 세워진지 거의 1000년이 뒤에 민간에서 전해지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인 800년경에 세워진 무장사비에 이미 무장사라는 절 이름이 등장하므로 900년대의 고려 태조라 기록한 것은 시대가 맞지 않기에 신뢰하기 어렵다고 본 견해가 있다. 다만 이 견해도 삼국유사의 기록을 가장 신뢰하되, 삼국을 통일한 것은 태종 무열왕이 아니라 문무왕이므로 삼국유사기록에서 전하는 태종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오기로 보았다.(이종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