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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수십년 복무한 군인, 가족 사진 다 모아도 앨범 하나 못 채운다기에…"

도깨비-1 2017. 5. 27. 07:47

 

[Why] "수십년 복무한 군인, 가족 사진 다 모아도 앨범 하나 못 채운다기에…"

 

 

 

입력 : 2017.05.27 03:02 / 조선일보

 전현석 기자

軍 장병 2000여명 찍은 사진작가 라미 현(Rami Hyun)씨

가장 기억에 남는 군인은…
6·25 참전용사와 외손녀인 중위가 찍을 때
'할아버지 표정 어두우니 좀 웃으시라' 장난하자
'군복 입고 웃으면 되냐' 버럭 화내시는 모습 선해

비용은 편지 한 통이면 충분
장병 독사진과 단체 사진 기꺼이 찾아가 촬영하죠
물론 모두 무료로 나눠주고…

군인 사진 찍는 게 좋은 이유
장병들이 고맙다면서 음료수 한 잔 건네 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빼곡한 사연 담긴 편지받을 땐 더욱 힘 나죠

지난 8일 낮 12시쯤 강원도 삼척 도계읍, 인적 없는 검은 산. 군인 30여 명이 정상을 향해 걸었다. 쾨쾨한 냄새가 진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있어 자욱한 연기가 주변을 감쌌다. 눈이 매워 뜨기 힘들었다.

"작전 개시!" 구호와 함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지난 6일 발생한 삼척 산불 진압 작전에 투입된 육군 23사단 57연대 소속 장병이었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곳의 잔불 제거가 이날 군인들 임무였지만, 곳곳에서 어른 키 높이만 한 불이 치솟았다. 공중에 떠다니던 작은 불씨가 아직 덜 탄 마른 나무나 풀에 내려 앉아 다시 활활 타올랐다. 띠를 이루면서 타는 모습이 꿈틀거리는 뱀 같다. 불은 이쪽을 끄면 저쪽으로 옮아붙었고, 저쪽을 끄면 이쪽에서 다시 살아났다.

장병들은 15L 물통, 삽, 곡괭이를 들고 경사 30도 이상 돼 보이는 비탈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불을 껐다. 그 사이에 사진작가 라미 현(Rami Hyun·38·본명 현효제)씨가 있었다. 그는 산불 끄는 군인들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군이 삼척 산불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는 걸 7일 알게 됐어요. 바로 육군 쪽에 연락해서 '군에서 산불 진압 작전 사진 찍나요?' 물었더니 '산불 끄기 바쁜데 촬영할 여력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부대 허락 받고 이튿날 새벽 직접 운전해서 왔어요. 산불 꺼 본 적이 없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지 몰랐어요. 몇 시간 동안 몇 ㎞ 걷고, 화상 입을 뻔하고, 연기 들이마셔서 눈물 콧물 흘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생각했어요. '오길 정말 잘했다'고요."

―오길 정말 잘했다니요.

"제 사진으로나마 장병들이 이렇게 고생하면서 산불 껐다는 걸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니까요."


 

 
라미 현씨는 군인 전문 사진작가다. 그는 “정전 70주년이 되는 2023년에 21개 유엔 참전국을 찾아 6·25 당시 군복을 입은 참전용사 사진을 찍고 싶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분들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예우일 것 같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50여 부대 장병 2000명 찍어

현씨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군부대 50여곳을 돌며 군복 입은 장병 2000여명 사진을 찍었다. 현역 군인뿐만 아니라 6·25와 베트남전 참전 용사, 남북한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 외국군 장교도 찍었다. 작년 국군의 날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특별 사진전 '나는 군인이다'를 열었다. 페이스북 'I am a soldier―나는 군인입니다'를 통해서도 군인 사진을 계속 올리고 있다. 사진 파일은 군과 장병에게 모두 무료로 나눠주는데, 사진 찍는 경비는 모두 자비로 충당해 왔다.

17일 서울 서교동 한 건물 지하에 있는 현씨 스튜디오 입구에는 비무장지대(DMZ)에서 찍은 장병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스튜디오는 어수선했다. 원래 서울 성수동에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지난달 27일 이곳으로 이사했고 짐 정리가 덜 끝나서였다. 현씨는 "군인 사진 찍으러 전국 군부대를 돌다 보니 돈 되는 일이 많이 줄었다"며 "월세 더 적게 내는 곳으로 이사하게 됐다"고 했다.

―원래 광고 사진을 주로 찍었다면서요?

"기업 광고나 패션 잡지 사진을 주로 찍었어요. 제가 클래식을 좋아해서 공연 광고 사진도 많이 촬영했고요."

―군인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있겠군요.

"서울대병원 외과 홍보 영상 만든 적이 있는데, 이걸 본 육군 1사단에서 '부대 소개 영화를 제작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전에 만든 부대 영상을 보니까 전문 성우가 내레이션을 했더라고요. 군 홍보 영상에는 실제 군인 목소리가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고 장병 약 50여명을 인터뷰했는데, 그때 충격 받았어요."

―왜 충격을 받았나요?

"한 원사가 GOP(최전방 소초) 근무를 3년 동안 했는데, 집에 간 날이 200일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대학생 아들이 둘 있는데 같이 보낸 시간이 거의 없어서 가족사진 다 모아도 앨범 하나를 못 채운대요. '30년 가까이 군 생활 하면서 국가에는 부끄럽지 않지만 내 가족에게는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해요.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아직 가족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는데 곧 전역해서 다 같이 여행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한 장군은 관사에서 서른 살 넘긴 딸하고 같이 산대요. 장군이 딸에게 '너도 이제 시집 가라'고 했더니 딸이 버럭 화를 냈대요. '아빠랑 초등학교 5학년 이후 같이 산 적 한 번도 없어. 지금 결혼하면 또 헤어져 살게 되잖아. 아빠랑 좀 더 같이 살고 싶다고!' 하면서요. 이런 군인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육군 군복 150여종 기록 남겨

그는 지금까지 찍은 군인 사진 중 육군 군복 150여종을 따로 정리했다. "육군 복장 규정집을 봤는데 거기에는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만 그려져 있더라고요. 우리나라가 기념하는 건 좋아하는데 기록은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기록을 남겨야 역사가 되고 그게 나중에 힘이 되잖아요."

―기억에 남는 군인이 있습니까.

"6·25 참전 용사와 그분의 외손녀 중위 두 분을 같이 찍을 때였어요. 할아버지 표정이 어두우니까 외손녀가 좀 웃으시라고 장난을 쳤는데 할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요. '나라 지키는 군인이 사복도 아니고 군복 입고 사진 찍을 때 웃으면 되겠냐'면서요. 할아버지는 올해 92세인데, 군복 벗은 지 7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군복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남달랐어요."

―군인이 군복에 자부심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대한민국 군인과 국민 모두 군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옷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한번은 전방 부대 촬영 나갔는데, 간부들이 퇴근할 때 되니까 대부분 사복으로 갈아입더라고요. 이유를 물으니 '군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고 해요. 군 가혹 행위와 자살·사망 사건이 잇따라 터졌을 때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군복을 이렇게 대해도 되나 싶었어요. 군인 사진 더 열심히 잘 찍어서 군복에 대한 자부심을 높여주자 결심했죠. 사진기 등 장비도 최고로 좋은 걸로 사고요."

―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네요.

"군 복무 할 때는 전혀 안 그랬어요. 군대 있을 때 뺀질뺀질했고요. 군 간부는 병사들의 적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군대 덕분에 인생이 바뀐 건 맞아요. 군대 안 갔으면 사진도 안 배웠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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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현씨가 2016년 찍은 6·25 참전용사 김행경씨와 그의 외손녀 홍다교 중위(현재 대위). / 라미 현 씨 제공

 

비용은 장병 편지 한 통이면 충분


그는 한양대 사학과를 다니다 2001년 입대해 육군종합군수학교에 들어갔다. 원래 지게차 운전 조교였는데, 부대에 컴퓨터그래픽(CBT) 담당 병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CBT병으로도 근무하게 됐다. 현씨는 "입대 전에 컴퓨터그래픽은 하나도 몰랐지만 포토샵부터 웹 디자인, 3D까지 책 보고 다 배웠다"고 했다. 그는 이때 컴퓨터 그래픽에 흥미를 느끼게 됐고, 군 제대 후 학교를 중퇴하고 200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예술대학인 AAU(Academy of Art University)에 입학했다. 원래 컴퓨터 그래픽 영화 특수 효과를 배우려 했지만, 학비를 벌려고 결혼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진에 빠져서 전공을 바꿨다.

장병이 스튜디오로 편지를 써서 보내면 해당 부대로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현씨는 11사단 신병교육대의 한 병장이 쓴 편지를 받고 15일 부대에 가서 하루 내내 훈련병 200여 명의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는 군인은 자기 스튜디오로 초청해 사진을 찍는다.

―돈도 안 되는데, 뭐하러 군인 사진 찍으러 다니냐는 분들도 있겠군요.

"당장 아버지께서 이러세요. '유학 갔다 오면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릴 줄 알았는데 뭐하는 짓이냐'고요. 그랬던 아버지도 군복 모델이 됐어요. 베트남전에 통역병으로 참전하셨거든요. 처음엔 안 찍겠다고 고집 부리셨지만요, 지금 아버지 휴대전화 배경 화면이 제가 찍어드린 사진입니다. 몇 년째 안 바뀌어요."

―군인 사진 찍는 게 그렇게 좋습니까?

"돈 많이 벌고 싶고 유명인사도 찍고 싶고 그런 마음도 조금 있죠. 군인 사진 찍으려면 부대 허가 받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힘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왜 사진 찍고 싶은지 빼곡한 사연 담긴 편지 한 통 받을 때 마다 힘이 납니다. 사진 찍고 나서 장병들이 '고맙습니다' 하면서 음료수 한 잔 건네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군인 사진 잘 찍는 비결이 있겠군요.

"전문 모델이 아니다 보니 처음에는 대부분 어색해하고 많이 부끄러워하지만 한마디 하면 분위기가 바뀌고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옵니다. '지금 군 복무하는 그 느낌으로 찍으면 됩니다' 이렇게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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