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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총독 되겠다던 꼬마에서 시대의 스승으로…故신영복의 일생

도깨비-1 2016. 1. 18. 15:44

일본총독 되겠다던 꼬마에서 시대의 스승으로…故신영복의 일생

어린이의 맑은 마음 가진 신영복, '청구회' 어린이들과 우정 맺어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6-01-18 14:01:58 송고

 


고 신영복 교수(도서출판 돌베개 제공)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인 신영복(1941~2016)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곁을 떠났다. 사인은 희귀암인 ‘흑색종암’.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이 몹쓸병이 어쩌면 감옥에서 20년간을 지낸 탓인지도 모른다고 보는 이도 있다.

20대 청년으로 들어가 지천명(50세)에 가까운 중년이 되어 나온 억울하고 기가 막힌 감옥생활.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성자처럼 성찰이 깊은 신영복은 감옥의 나날을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었다고 불렀다. 사회 각 층의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대학과정’이었다고 했다.

불로 제련해 순금을 만들듯, 진흙탕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고통스런 삶 속에서 깊은 성찰과 깨달음을 일궈낸 신영복의 삶을 더듬어본다.
1942년 누나, 형과 함께 찍힌 신영복의 아기 때 모습(출처: 신영복 공식 홈페이지)


◇조선이 독립한 후 일본을 식민지로 해 총독이 되겠다던 꼬마

신영복의 삶에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이 보통 그렇듯 시대의 굴곡이 아로새겨 있다. 하지만 시대가 준 고통을 탓하지 않고 그를 자양분 삼아 자신을 성장시킨 점에서 신영복의 인생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신영복은 1941년 부친이 경상남도 의령에서 교장으로 근무할 때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랑방에 드나드는 아버지 친구들이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신영복은 '일본총독이 되어 일본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장차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총독이 되겠다는 꼬마의 당찬 포부였다.

◇사형선고 받자 못 지키게 된 약속 걱정

신영복은 청년시절 4.19와 5.16을 겪으며 현실 속 사회와 정치문제를 점점 깨닫게 됐다. 서울대학교 입학 후 그는 5.16이 일어난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1965년 대학원 졸업식 당시 신영복 선생(출처: 신영복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신영복의 활동은 후배들의 독서활동과 세미나를 지도해주는 학생운동 차원이었지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의 '간첩'행위가 아니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됐지만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사형'이 선고됐다(후에 무기징역으로 확정됨). 신영복은 사형이 선고된 순간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된 '청구회' 꼬마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청구회'의 어린 친구들

신영복이 사형수였던 시절에 쓴 글 '청구회 추억'이란 수필에는 그가 어린이들과 맺은 귀한 인연 이야기가 들어있다.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헌병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해진 이 글은, 신영복이 우연히 알게 돼 지속적으로 만나게 된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7~8학년 친구들을 위해서 쓴 것이다.

서울대 문학회 회원들과 어느 봄날 서오릉으로 한나절 소풍가던 길에 신영복은 쌀과 단무지, 냄비를 들고 가던 초라한 옷차림의 아이들 여섯 명을 만났다. 문화동 산동네에 살던 이들은 버스 회수권 두 장과 일금 10원씩을 준비하고 벼르고 벼르던 나들이를 가던 참이었다.

순수한 이들과 만나 하루를 즐기고 신영복은 이들을 잊었지만 아이들은 며칠 후 고맙다는 엽서를 보냈다. 신영복은 아이들을 잊었던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그후 이들과 우정을 맺었다. '청구회'라고 모임의 이름도 짓고 매달 같이 책도 읽고 놀러도 다니며 정기모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에게 두 명의 결원이 생기자 이들은 새로운 멤버를 충원할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요즘에는 좋은 아이가 드물다'면서 고심하다가 며칠 후 신영복에게 아이 두 명을 데려왔다. 그런데 두 명의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같이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신영복은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두 아이가 틀림없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씨야말로 딱할 정도로 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아이들조차 '반체제 인사'들로 간주하며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고 신영복을 고문했다. 신영복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준 노래 중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는 가사를 문제삼으며 ‘주먹 쥐고’가 국가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런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자 신영복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앞에서 2년 넘게 만나던 꼬마 친구들이 자신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면 영문을 모르고 걱정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감옥은 나의 학교

20대 후반의 청년 신영복은 감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됐다. 예를 들어 같은 밖에서 목수 일을 했던 감옥 동료 한 명이 집을 그리는 것을 보고는 '목수가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거구나'하는 깨닫는다.

특히 감옥에서 그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어깨동무체'라고도 불리는 그의 독특한 글씨체는 한글의 형상미를 독특하게 살리면서도 획과 획, 글자와 글자가 서로 기대는 모습으로 '관계'를 중시하고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사상을 상징한다.

미술 사학자 유홍준은 그의 글씨체에 대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뜻을 같이 하여 북돋는 듯한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1988년 8월 14일 출소 당일 신영복 선생(출처: 신영복 공식 홈페이지)


◇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

신영복의 일생의 화두는 '공부'였다. 2007년 한 강연에서 그는 '무릇 대학생활은 그릇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닌 그릇 자체의 크기를 키워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공부의 방식은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깨닫는 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어리석은 듯이 보이는 꾸준한 공부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고 보았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2015년 스승의 날에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가 답례로 이런 말을 했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의 제자인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올바르게 걸어가도록 합니다."
고 신영복 교수© 돌베개 제공





권영미 기자(ungaung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