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Why] 이별은 만 가지 표정으로 다가오지만, 슬픔은 하나다

도깨비-1 2017. 5. 27. 07:33

 

[Why] 이별은 만 가지 표정으로 다가오지만, 슬픔은 하나다

 

 

입력 : 2017.05.27 03:02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이주호(왼쪽)·유익종 시절의 해바라기 

 

이주호(왼쪽)·유익종 시절의 해바라기 / 조선일보DB

 

 

 

"하늘 높이/ 흰 구름 둥실 떠가며/ 내 마음 볼까 봐/ 고개 숙이네"―해바라기 '시들은 꽃' 중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인연은 다한 후에야 비로소 그 자리의 크기가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이별은 준비 없이 오고, 인연은 다시 우연 속으로 사라진다. 모든 인연은 일회적이므로, 되돌릴 수 없으므로 사무친다. 서로가 돌아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몇 방울의 눈물이 필요하다.

곁에 오래 머무르며 반짝일 것 같던 사랑의 날도 쉬 저문다. 느닷없이 찾아온 실연처럼 "때 없이 꽃은 시들"었다. 꽃피고 향기 드높을 때, 오늘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의 이별은 만 가지 표정으로 오지만 슬픔은 하나다. 허전한 마음 둘 곳 없어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흰 구름 둥실 떠" 간다. 그리고 그 구름이 "내 마음 볼까 봐 고개 숙인"다. 얼마나 여리고 티 없는 영혼이길래, 그 아픔을 들킬까 봐 고개 떨구는가. 고개만 숙인 줄 알았는데, 그 남자 몰래 "울고 있다." 저 눈물 안에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이 있으리라.

"떠나간 사람처럼 사랑을 했던" 그 꽃의 잔영은 길다. 어느 바람결에 사라진 "꽃 내음 잊을 수 없어" 길을 잃고 헤맨다. 누군가의 부재를 지우기 위해선 사랑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낮과 밤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혼자만 길을 거닌다." 그 길이 눈물처럼 "비에 젖어" 있다.

해바라기 2집 앨범에 실렸던 '시들은 꽃'은 1980년대 포크 음악의 대표적 유산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매혹적이다. 해바라기 특유의 감성적 사랑 노래들과 결이 다른 이 곡은, 팀의 리더이자 창작자인 이주호의 음악적 감각이 특별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워낙 많은 트랙이 히트한 앨범이라 그 빛에 가려져 있지만,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곡이다.

이 곡에선 우리들이 잃어버린 순정의 기억이 숨 쉬고 있다. 노래처럼 외롭고 쓸쓸한 세상의 풍경이 내 것처럼 아프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궁핍했지만 영혼은 풍요로웠던 그때, 마음은 한없이 낮았으며 노래는 기도처럼 간절했다. 이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르면 상처 위로 초롱한 별이 뜰 것만 같다. 그 별을 길잡이 삼아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다. 이 아름다운 슬픔의 길을 열어준 이주호의 특별한 감성에 감사한다.

이주호는 창작뿐 아니라 노래도 탁월하다. 섬세한 떨림을 담아내는 미성에, 힘과 역동성까지 갖춘 드문 보컬이다. 조용한 탄식 같은 읊조림과 도도한 샤우팅을 오가며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한 이주호의 보컬이 없었다면, 이 곡의 슬픔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대 포크 음악의 절정을 이끌었던 해바라기는 수많은 청년을 통기타와 씨름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듀오였으나 사실상 이주호에 의한, 이주호를 위한 팀이었다. 1집 멤버 유익종을 제외하면, 거쳐간 파트너들은 코러스에 가까운 보조적 보컬에 그쳤다. 거의 모든 곡을 이주호가 만들었고, 쓰는 곡마다 히트곡 대열에 안착시켰다. 상업적 성공뿐 아니라 음악적 성과도 크고 많았다. '행복을 주는 사람'에선 코드와 멜로디의 혁신을 선보였으며, '갈 수 없는 나라'에선 진지하고 사회성 높은 질문을 던졌다. '그날 이후'는 졸업을 소재로 한 수많은 곡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해바라기의 대표곡이 '사랑으로'가 된 건 아이러니다. 건전가요풍의 이 노래는 이주호가 보여준 그 다채로운 음악적 스펙트럼에 비춰본다면, 다소 퇴행적이라 할 만큼 희망의 내용이 상투적이다. 공중파의 전폭적 후원 탓이 크지만, 80년대를 종횡한 그의 음악적 영광을 이 곡으로 대표할 순 없다.

들면 나고 만나면 헤어진다. 모든 인연의 끝에서 잠시 젖어드는 눈가를 훔치고 나면, 삶은 조금 헐거워지고 무심해질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외롭게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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