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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에서] 블랙리스트보다 못한 僞善

도깨비-1 2017. 2. 2. 11:48

[데스크에서] 블랙리스트보다 못한 僞善

 

유석재 문화부 차장 |

 2017/01/26 03:04

 

 "20년 전 어느 극단에서 일했다가 그릇 파는 회사에서 외판원 생활을 했던 사람을 문화부 산하 기관장에 앉혀 달라는 청탁도 받은 적 있다." 청와대로부터 쏟아지는 인사 청탁에 시달렸던 문화부 차관의 토로였다.

그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10여건의 인사 청탁을 거절한 뒤 해임됐다.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이다. 그 차관은 2013년 같은 부처 장관이 돼 이듬해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압력을 받은 유진룡이다.

 

 10여년 전 문화예술계에는 '개코 인사' '연대의 시대'라는 말이 돌았다. '개코 인사'란 '개혁 코드 인사'의 준말로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 분야의 주요 기관장을 진보·좌파 인사들이 싹쓸이하다시피 한 현상을 빗댄 말이다. '연대의 시대' 역시 진보 계열 인사들이 중심이 된 '문화연대' 출신들이 새로운 문화 권력이 된 상황을 말하는 용어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이들은 "새 정부의 문화계에선 기득권 세력이 발을 못 붙이게 하고, 진보 개혁 세력이 대거 포진해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정치색에 따라 피아와 명암이 뚜렷이 갈렸다. '우리 편'은 밀어주고 '저쪽 편'은 밀어내는 논리가 5년 내내 계속됐다.

 

 문체부가 지난 23일 대국민 사과문과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책을 발표했다. 특검 수사가 남긴 했지만, 특정 문화계 인사에게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 자체의 수명은 다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정부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블랙리스트라는 현 정부의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문화 융성'을 내걸면서 엉성한 기준으로 청와대의 적(敵)들을 골라내 불이익을 준 행위는 시대착오적 검열에 불과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태를 마치 처음 보는 듯 핏대 올리는 야권 인사들에게선 기이한 위선(僞善)이 느껴진다. 10여년 전 자신들이 문화계에 벌여 놓았던 '코드 인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문화예술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사(戰士)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계에 밝은 인사가 많았던 노무현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진 반면, 박근혜 정부에선 훨씬 서툴고 거친 방식으로 하다가 곳곳에서 '사고'를 낸 셈이지만, 정치색에 따른 문화계 편 가르기 작업이 행해졌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어느 정권이든 자신의 코드나 정치색에 맞게 문화예술계를 장악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점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문화란 정치의 시종이거나 문선대에 불과하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정치와 문화의 불행한 만남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유혹을 떨쳐내는 길밖에는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위선에서 벗어나야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다.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