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활동하다 수배를 받던 필자가 1991년 5월 초 '강경대군 치사사건 투쟁본부'가 있던 연세대에 들렀을 때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자신의 증명사진을 보여주었다. 며칠 후 그의 분신(焚身) 소식을 들었고, 사진을 보여준 행동이 분신의 암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신 사건은 결국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씨의 유서 대필 사건으로 번졌고, 설마 했지만, 유죄가 확정되었고 24년 만에 강씨는 누명을 벗게 되었다.
왜 당시 검찰은 글 쓰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김기설씨가 굳이 타인에게 유서 대필을 맡겼을 거라는 극히 예외적인 가정을 하게 되었을까? 이 사건을 접할 때마다 항상 들던 의문이다. 유서 대필은 동료의 자살 결심을 듣고도 말리는 대신 그 결행을 돕고, 더 나아가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서까지 만들어 주면서 압박 수준의 유도를 했다는 의미다.
필자는 유서 대필 수사 소식을 듣고 그 발상에 놀랐고, 혐의자가 강기훈씨라는 데 더욱 놀랐다. 전민련 실무자 중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친구가 강기훈씨였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검찰은 운동권이 동료의 자살을 유도하여 투쟁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반(反)인륜적 사고가 가능한 집단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비록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운동권을 떠났지만 운동권에 대한 이런 시각은 편견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전민련 동료들은 유서 대필 사건은 정권의 지시에 따른 검찰의 의도적인 누명 씌우기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전례 없이 정치적 분신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검찰은 기획을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 결과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운동권과 검찰을 비롯한 권력 엘리트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가로놓여 있어 각자 상대방을 괴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던 것 같다. 서로 타도나 격리의 대상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니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번에 재심(再審) 법원들은 국과수의 필적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는데 유서 대필이 벌어지기 힘든 일이라는 상식을 모를 리 없는 검찰이 유일한 증거인 필적 검증에 왜 더 신중하지 않았을까? 역시 정국 안정이 절실하다는 정치적 요구가 검찰을 합리적 사고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지나친 선험적 확신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논란은 현재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흔들리면 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기 때문에 늘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 검찰에 대한 기억에 갇혀 아직도 집권층이 수사 여부나 방향을 일일이 지시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통념은 현실과 거리가 멀고 민주화 이후의 상당한 변화를 인정하면서 개선을 요구하는 태도가 적절해 보인다.
검찰이 오류를 범하더라도 법원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한 유죄판결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임은 사법부에 있다. 세상에 누구도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스스로 오류를 인정하고 교정했으니 법원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재심 판결은 검찰이나 사법부, 운동권이, 지루한 법정다툼이 주는 교훈을 저마다 되새기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홍진표 계간 시대정신 편집인·前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기고] '유서 대필' 再審 판결이 주는 교훈
발행일 : 2015.05.16 / 여론/독자 A27 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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