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빵과 서커스'의 自殺 코스
입력 : 2015.05.08 03:20 / 조선일보
무상복지·포퓰리즘 취한 사회, 로마처럼 자체 몰락하기 마련
대중은 福祉 바라며 增稅 거부… 엘리트는 인기에 매몰된 한국
자기 해결 능력을 상실한 것이 日우경화·中팽창보다 심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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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훈 디지털뉴스본부장
아베 정권은 왜 그리도 염치 없느냐고 남 탓만 할 게 아니다. 지금 우리를 옥죄는 외교 고립의 딜레마는 상당 부분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주범(主犯)은 물론 아베의 우경화 폭주(暴走)지만 그에게 날개까지 달아준 게 우리다. 정치권력과 외교 마피아들이 '외교' 대신 반일(反日) 포퓰리즘의 '국내 정치'를 한 결과가 자승자박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첫 단초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대일(對日) 강경책이었다는 데 이견(異見)을 다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일본에 유화적이던 이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 해에 돌연 '조용한 외교'를 폐기하고 독도 방문을 강행했다. "일본의 국력이 옛날 같지 않다"는 비(非)외교적 발언까지 쏟아냈다. 폼 나는 '일본 훈계(訓戒)' 퍼포먼스 덕에 지지율이 올라가자 이 대통령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의 혐한(嫌韓) 심리를 폭발시킨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렇게 우경화 여건이 조성된 직후 총리에 오른 아베로선 이 대통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 같다.
1975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한 편의 논문이 실렸다. '일본의 자살(自殺)'이란 의미심장한 제목 아래 일군(一群)의 지식인 그룹이 공동 집필한 문건이었다. 필자들은 동서고금 제(諸) 문명을 분석한 결과 모든 국가가 외적(外敵) 아닌 내부 요인 때문에 스스로 붕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찾아낸 '국가 자살'의 공통 요인은 이기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이었다. 국민이 좁은 이익만 추종하고 지배 엘리트가 대중에 영합할 때 그 나라는 쇠망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잊혔던 이 논문은 몇 년 전 아사히신문이 인용하면서 다시 유명해졌다.
논문은 로마제국의 쇠락 원인을 '빵과 서커스'로 요약했다. 로마가 번영을 구가하면서 로마 시민은 책임과 의무를 잊은 '도덕적 유민(遊民)'으로 변질됐다. 그들은 대지주와 정치인에게 몰려가 '빵'을 요구했고 지배계층은 환심을 사려 공짜로 빵을 주었다. 무료 빵을 보장받아 시간이 남아도는 시민들이 무료해하자 지배층은 '서커스'까지 제공했다. 기원후 1세기 클라디우스 황제 시대 콜로세움(원형경기장)에선 격투기 같은 구경거리가 1년에 93회나 열렸다. 그것이 날로 늘어나 4세기 무렵엔 무려 175일간 서커스가 벌어지는 상황이 됐다.
대중이 권리만 주장하고 엘리트가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 할 때 그 사회는 자살 코스로 접어든다. 로마는 활력 없는 '복지국가'와 태만한 '레저사회'로 변질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것은 로마만의 일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출현했던 모든 국가와 문명이 자체 모순 때문에 스스로 몰락했다. 한 국가가 기개를 잃고 자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자살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빵은 무상복지, 서커스는 포퓰리즘을 상징한다. 40년 전 논문을 다시 꺼내 정독(精讀)한 것은 대한민국의 상황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눈앞의 이익만 취하려 하는 근시안적 이기주의다. 증세(增稅)를 거부하면서 복지를 원하고, 다가올 재정 파탄엔 눈감은 채 당장의 몫을 더 달라고 한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기적을 낳은 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인내하는 절제심과 책임감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엔 미래는 없고 현재만 있다. 미래를 준비하며 국가 전략을 짜야 할 정치·관료 엘리트들은 인기에만 영합하며 문제를 눙치고 있다.
결국 파기됐지만 공무원연금 개혁을 둘러싼 여야 합의는 '빵과 서커스'의 전형이었다. 고치는 시늉만 하고 공무원연금 파산의 구조적 원인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국민연금까지 끌어들여 1600조원이나 더 얹어주겠다는 불가능한 약속까지 하면서 포퓰리즘의 극치를 달렸다. 야당은 국익 대신 공무원 집단 편을 들었고, 여당은 야합했다. 야당은 공무원연금으로 모자라 국민연금까지 포퓰리즘의 난장판으로 끌어들였고 여당도 야합했다. 여도 야도 눈앞의 현재만 달콤하게 속이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정치 서커스'에 열 올린 결과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빵과 서커스'의 국가 자살 징후는 온갖 분야에서 목격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의 부작용을 알면서 세종시를 만들었고, 비용만 천문학적으로 드는 세월호 인양을 결정했다. 무상급식·무상보육이 서민층 몫을 더 줄이는 역설(逆說)을 보고도 여전히 무상복지를 외친다. 집단 이익이 국가 이익보다 우선시되고 당장의 몫을 쟁취하려는 떼쓰기가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일본의 우경화도, 중국의 팽창주의도 아니다. 병리(病理)를 알면서도 치유할 힘을 잃은 자기 해결 능력 상실이 더 문제다. 망조(亡兆)가 든 나라는 타살(他殺) 당하기 전에 스스로 쇠락하는 법이다. 국가의 자살을 걱정한 40년 전 일본 지식인들의 경고가 무섭도록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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