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영국을 되살린 實用主義
입력 : 2015.05.12 03:00 / 조선일보
영국의 선데이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영국 최고의 부자는 석유 재벌 레오나드 블라바트니크(58)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영국인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인이다. 2위는 인도인이고, 3위·4위는 캐나다인과 러시아인이다. 5위에 가서야 영국인(부동산 사업가 루벤 형제)이 나타난다. 15위 안에 영국 국적자는 단 3명에 그친다.
영국의 부자 명단에 외국인이 대거 포진하는 건 송금주의 과세제라는 독특한 세제(稅制) 때문이다. 외국인이 영국에 장기 거주하면서 매년 5만파운드(약 8420만원)를 내면 해외에서 번 돈을 영국 안으로 들여오지 않는 한 추가 소득세를 안 받는다. 1799년부터 시행 중인 이 제도는 런던이 세계의 자산가들을 끌어모은 비결이다.
그런데 이번 영국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노동당의 에드 밀리밴드 당수가 이 제도를 없애겠다는 걸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일견 타당하다. 영국이 조세 피난처로 이용되는 측면이 있는 데다 내국인과 형평에 안 맞는 특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리밴드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하면 수만명의 외국인 부호가 영국 내 투자 활동을 접은 뒤 돈뭉치를 싸들고 고국행 비행기를 탈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게 부각됐다. 일자리 감소를 걱정한 것이다. 결국 팽팽하리라던 선거는 여당인 보수당이 압승했다. 외국인들이 얄밉다고 해서 그들을 쫓아내 봐야 실리(實利)가 없다는 실용주의적 시각이 표심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영국인들은 무상보육 확대, 에너지 요금 동결 같은 밀리밴드의 달콤한 공약들도 덥석 물지 않았다. 영국병(病)을 겪어본 그들은 듣기에 그럴싸하지만 재정 부담이 커지는 공약을 걸러내는 선구안(選球眼)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은 영국에서 발붙이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영국은 체면치레를 피하고 철저히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2년 전 중앙은행 수장(首長)에 '용병(傭兵)'을 기용하는 파격을 보여줬다. 마크 카니 전 캐나다중앙은행 총재는 영란은행(BoE) 창립 319년 만의 첫 외국인 총재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은행 총재에 외국인을 앉힐 수 있을까. 영국은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도 G7 국가 중에서 맨 처음 합류 선언을 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선진국들이 우물쭈물할 때 중국이 만든 배에 승선하겠다고 먼저 손을 든 것이다.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원은 사우디아라비아 부호 와픽 사이드의 이름을 따서 사이드 스쿨이고, 행정대학원은 올해 영국 최고 갑부의 이름대로 블라바트니크 스쿨이다. 외국인의 돈을 받아와 그들의 이름을 붙인 학교에서 국가 지도자를 길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게 영국식 실용주의다.
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 영국 경제가 2.7%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독일(1.6%), 프랑스(1.2%)를 압도한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도 꽤 많이 줄였다. 실용주의로 위기를 걷어내는 영국과 감성(感性)에 젖은 주장이 국가적 중대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한국은 너무나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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