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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국제시장'

도깨비-1 2015. 1. 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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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국제시장'

입력 : 2015.01.08 03:05  /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부 차장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나 戰場서 총상입고 타향살이
가시덤불 운명과 死鬪하며 꿋꿋이 살아낸 모진 인생
'위대한 세대' 칭송은커녕 그 뜨거운 삶을 헐뜯는가

 

 

'국제시장'은 소위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연기도 어색하고 대사가 낯간지러운 대목도 많다. '두사부일체'부터 '해운대'까지 윤제균 감독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랬다. 보통은 배우가 과잉 연기를 하면 감독이 말리는데 윤 감독 영화에선 감독이 과잉 연기를 주문하고 배우가 진정시킨단다. '국제시장'도 말미에 주인공이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예" 같은 대사는 빼는 게 나았다. 배우 눈빛을 보고 관객이 그런 대사를 상상케 하는 것이 더 영화적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윤 감독 영화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진심이 담겨 있다고 할까. 술 한잔 하고 옛날 얘기가 나오면 엉엉 우는 윤 감독의 순정(純情)을 잘 알기에 '국제시장'은 만듦새가 좀 부족해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적어도 세 번 울었다.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게는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의 영화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영화였다.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아버지는 흥남 철수 때 국군에 자원입대해 수송선을 타고 월남하셨다. 함남고급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를 치른 1950년 6월, 김일성대학에 갈까 원산농대에 갈까 하던 차에 전쟁이 났다. 미군이 피란길을 막아 18세 소년이 남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학도병 입대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9년 전 펴낸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셨다. "부두와 연안 비행장에 쌓아뒀던 군수물자를 폭파하고 소각하는 붉은 화염이 12월의 밤하늘을 온통 물들이는 가운데 부두에 내려온 피란민 군중은 서로 뒤엉켜 부르짖으며 찾아 헤매고 앞다투어 수송선에 몸을 실으려고 아비규환이었다. 우리는 멀어져가는 고향 산천의 아스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수송선 난간에 기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불렀던 노래 가사를 바꿔 목청껏 불렀다. '안녕 안녕 함흥거리여/ 다시 올 때까지/ 잠깐의 이별을 눈물로 감추네/ 추억 어린 함흥 거리거리마다/ 반룡산 봉우리의 십자성이 그립구나….'"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나 광복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 됐다가, 김일성대학에 진학하려던 해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서 일본 군가(軍歌)를 부르며 월남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 포레스트 검프나 덕수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이지만 저토록 기구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낀 아버지는 누굴 원망해야 하는가.

[한현우의 팝 컬처] 아버지의 '국제시장'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거제도로 실려간 피란민들과 달리 아버지와 학도병들은 묵호항에 내려 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아버지는 이듬해 5월 강원 양양군 오색리 전투에서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8월 명예제대하셨다. 휴전 때까지 거제도에서 근근이 생활하던 아버지는 1954년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범일동 철길 옆 판잣집에 살며 석탄 화차 기관사가 동정 삼아 퍼주는 석탄을 주워다 코크스를 만들어 국제시장 빵집 '수월당'에 팔았다.

영화 '국제시장'이 어떤 관객에겐 애국심을 강요하고 가르치려 드는 걸로 읽히는 모양이다. 내게는 그저 지독하게 기구한 운명을 헤쳐나간 어떤 개인의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스토리에 역사의식이 결핍됐다거나 정신 승리를 강요하는 사회가 구역질 난다고 한다면 아버지 자서전에서 골라낸 한 구절로 답하고 싶다. 1951년 3월 설악산 가리봉 전투에서 인민군과 대치한 상황 묘사 중 일부다.

"황량하고 눈 덮인 산속, 달빛은 차갑고 삭풍이 뼛속까지 저리는데 헐벗고 굶주리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결판의 전쟁터, 무슨 애국심이며 조국통일 염원이며 적을 향한 적개심이 있겠는가? 오로지 따뜻한 아랫목에서 식구들끼리 오순도순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엄마! 엄마!' 하고 속으로 쉴 새 없이 엄마를 불렀다."

아버지는 친구 분과 영화 '국제시장'을 보셨다. 의외로 반응이 무덤덤했다. "흥남부두 장면은 그때랑 똑같더구나. 그런데 너무 이야깃거리를 만들려고 비틀었지 않니? 그리고 함경도 사투리가 그게 뭐이니? 난 그저 그랬다." 아버지는 1983년 KBS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했을 때도 가족 찾기 신청을 안 했을 뿐 아니라 TV도 보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혼자 안방에서 많이 우셨다"는 말씀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건 한참 뒤였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때 태어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1950~60년대 경제 발전으로 미국을 세계 최강의 나라에 올려놓은 세대를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고 일컬어 존경한다. 저널리스트 톰 브로코는 말했다. "그들은 명예나 포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right thing to do)'이었기에 운명과 싸웠다."

아버지도 덕수도 4.19혁명에 앞장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지도 않았고 5·16쿠데타를 막지도 못했으며 5·18 때 광주에서 계엄군 총에 맞지도 않았다.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가시덤불 운명과 사투(死鬪)를 벌이며 살아왔다. 그 세대에 영화 한 편 바쳤기로서니 뭘 그리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