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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또 있다"

도깨비-1 2014. 10. 14. 13:31

"日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또 있다"

 

김성현 기자 / 조선일보

입력 : 2014.10.14 03:05

'광개토대왕릉비' 출간한 역사학자 이형구 석좌교수
일본 고대사 왜곡 비판 앞장

일본이 기존에 의혹이 제기된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외에도 추가로 조작한 구절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가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의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가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 의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이형구(70·사진) 선문대 석좌교수(역사학)는 최근 출간한 '광개토대왕릉비'(새녘) 개정증보판에서 "1880년대 일본이 '왜구대궤(倭寇大潰·왜구가 크게 궤멸됐다)'는 광개토대왕비의 구절에서 '구(寇)'자를 '만(滿)'자로, '대(大)'자를 '왜(倭)'자로 각각 끌질을 통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왜만왜궤(倭滿倭潰·성에 가득한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해석되게끔 했다는 것이다. 올해 광개토대왕비 건립 1600주년을 맞아 이 교수는 한국·일본·대만에 소장된 탁본 10여 점과 10여 차례의 현장 답사를 통해 "당시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장교들이 광개토대왕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비문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부터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조작설'은 한·중·일 역사학계의 첨예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왜(倭)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로 해석될 수 있는 비문 구절에서 촉발된 논쟁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이 구절을 근거로 4~6세기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에 의한 위조이거나 해석상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거기에 일본이 또 다른 위조를 자행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 교수는 1997년 아파트 공사장에 '잠입'해 마구 파헤친 흙더미 사이에서 백제 풍납토성 유물을 발견했다.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한 서기 475년까지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 서울 풍납동 일대에 있었다는 것이 그의 발견을 통해 '정설'로 굳어졌다. 이 교수는 "한·중·일 학자들이 자국 중심의 사관(史觀)에서 벗어나 광개토대왕비 연구를 공동 진행하거나 토론하기 위한 창구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광개토대왕비 탁본 비교분석 결과 日 조작 확실"

2014.09.29 | 연합뉴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학술회의서 발표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오랫동안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해 온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가 지난 100년간 생산된 여러 탁본을 비교·분석하고 현장을 조사한 결과 일본이 비문 기록을 조작했음이 확실시된다고 29일 주장했다.

이 교수는 29일 사단법인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 주최로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천6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아내인 박노희 동양고고학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기조강연을 통해 이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이들 부부는 일본이 일찍부터 자신들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광개토대왕릉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조작됐다는 연구 결과를 1981년 연세대 국학연구원 학술지 동방학지를 통해 내놓은 바 있다.

쌍구가묵본은 백지에 글자 윤곽을 베낀 뒤 글자 사이를 먹물로 채워 글씨가 하얗게 나타나게 하는 탁본 방식이다. 쌍구가묵본은 1883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카와 가게노부(酒내<包 안에 巳 대신 匕>景信) 중위가 만들었다.

이 탁본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경자년(庚子年, 400년) 기록에는 '왜가 신라성을 가득 채우고 성을 무너뜨렸다(倭滿倭潰城)'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경자년 기록 중 '滿'은 '도둑 구(寇)'자를, 이어지는 왜(倭)는 '대(大)'자를 각각 바꾼 조작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자면 경자년의 실제 기록은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가 아니라 '왜구가 고구려 원군과 신라군에게 궤멸됐다'는 내용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쌍구가묵본은 물론 이와 거의 같은 1909년 상하이 유정서국 탁본부터 이후 100여년간 10여종의 탁본을 비교·분석한 결과 문제가 되는 부분의 글자체가 계속 변화하고 흐릿해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사카와 중위가 쌍구가묵본을 뜰 당시 글자가 불분명한 부분에 석회를 발랐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981년 중국에서 나온 저우윈타이(周雲台) 탁본에서 '倭滿'이 '倭寇'로, '倭潰'가 '大潰'로 각각 바뀐 것은 당시 바른 석회가 비바람에 모두 제거된 결과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실제 작업해본 결과 비문에 종이를 대고 직접 쌍구가묵본을 뜨기란 불가능했고,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쌍구가묵본 문자는 서법이나 서예의 운기가 전혀 없는 인공적 '도안문자'여서 역사 왜곡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최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광개토대왕비를 방문해 살펴본 결과 문제가 된 부분의 글자가 끌질한 흔적을 찾아냈다"며 "일본 군부가 처음부터 '왜'자에 주목하고 비문 기록의 주어를 '왜'로 삼아 이를 중심으로 글자를 조작, 광개토대왕비가 마치 왜의 전적인 양 조작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puls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9/29 15:27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