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

나를 돌아보게 한 그녀의 和解

도깨비-1 2014. 9. 10. 10:01

나를 돌아보게 한 그녀의 和解

입력 : 2014.09.10 07:36 / 조선일보

육남매에 조카들 키운 이웃 아재… 술 취하면 조카딸 내동댕이쳐
먼 친척이 양녀로 데려간 연이… 사랑 속에 반듯한 성인으로 성장
"치매 앓는 큰아버지 돌봐 드리려 요양사 자격증을 따 내려왔어요"

최보금 공인중개사·수필가
최보금 공인중개사·수필가
요즘도 신문에서 아동 학대 기사를 보면 30여년 전 그때 일이 떠오른다. 그 아이가 처음 우리 마을에 온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웬 꼬마가 동네 우물가에 서 있었다. 맑은 눈동자에 윤기 나는 긴 머리, 오동통한 얼굴에 볼우물이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였다. 이름은 연이라고 했다. 아랫집 아재('아저씨'의 경상도 사투리) 조카딸인데 아재 집에서 살 것이라고 엄마가 일러주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니 잘 데리고 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섯 살, 일곱 살 사내아이 둘도 함께 왔다. 연이의 오빠들이라고 했다.

빈농(貧農)의 빠듯한 살림에 군식구라니…. 슬하에 육남매를 거느린 아재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다. 집안 장남으로서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조카들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처지고, 생각다 못해 근동(近洞)의 아우들을 불러 논의했으나 고만고만한 형편의 아우들이니 형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고 했다. 무슨 연유인지 누이의 아이들까지 몇 년씩 살다 가곤 했으니 아재 집은 흡사 아동보호소 같았다. 대처에 나가 성공한 동생 얘기를 할 때 어깨가 한 뼘은 올라가던 아재였다. 자랑스럽기만 했던 막내의 사업 실패로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아재 집의 일상(日常)은 삽시간에 온 동네로 퍼졌다. 바로 이웃인 우리 집에서는 그 집 식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알 수 있었다. 그럭저럭 사는가 싶더니 날이 갈수록 아이들 울음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나오는 날이 잦아졌다. 형제들이 많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울음소리가 차츰 심상치 않았다. 아재가 술 취한 날은 어른들의 고성(高聲)까지 쩌렁쩌렁했다.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아이는 바로 귀엽기만 했던 연이였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연이의 이마에 물렁물렁한 혹이 달려 있었다. 가부장적인 남편 밑에서 숨소리도 크게 못 내는 아이의 큰엄마는 그저 방관자일 따름이었다. 호위병 같던 아이의 오라비들도 속수무책으로 발만 구를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연이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엄마는 가끔 연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서 먹을 것도 주고, 내가 작아서 못 입는 옷도 입혀주며 보호막이 돼주곤 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물오물 작은 입으로 밥을 받아 먹던 앙증스러운 모습, 잔뜩 주눅 들어 잘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마루 끝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처연한 몰골, 기구한 아이의 운명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냄새에 찌든 연이를 커다란 물 함지박에 앉혀놓고 박박 문지르며 쏟아내던 엄마의 장탄식. "에구구, 그 팔자두 참! 허구헌 날 동상들 뒤치다꺼리는 혼자 다 허구, 핏뎅이 생질 놈들 키워 보낸 지가 월마나 됐다구, 에구, 불쌍헌 양반 같으니라구!" 엄마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연이를 마구 때리는 아재를 불쌍하다고 하는 엄마가 나는 이상하게 보였다. 연이는 그렇게 우리 집과 아재 집을 오가며 힘든 나날을 견뎠다.

어느 해 가을, 벼가 누렇게 익은 논길을 가르며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연이는 그 차를 타고 우리 동네를 떠났다. 아마도 일곱 살쯤 됐던 것 같다. 먼 친척뻘 되는 분이 양녀로 데려갔다고 했다. 그 후로 연이를 본 적은 없지만 티 없이 잘 자라서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는 소식은 간간이 들렸다. 다행히 어린 나이에 의지처를 찾아 양부모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성장했기에 반듯한 성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ESSAY] 나를 돌아보게 한 그녀의 和解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연이 어데 갔노? 퍼뜩 연이 데려온나!" 육신은 삭정이가 다 됐건만 아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당신이 그리도 구박하던 어린 조카딸이 대못이 되어 가슴을 파고드나 보다. 정신이 온전할 때 아픈 속내를 풀었더라면 사무치는 한(恨)은 남지 않았을 터인데…. 황폐해진 영혼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연이만 찾는다.

아재는 오늘도 대문 밖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벗겨진 양말을 신겨주고 있는 앳된 여인은 누굴까? 수수한 차림의 그녀가 조금은 낯익어 보인다.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그만 들어가세요. 큰아버지." 큰아버지라니? 잘못 들었나 싶어 다가간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연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샘나게 귀엽던 볼우물은 그대로였다. 예전에 그 아이, 아재가 오매불망하던 바로 그 아이 연이가 와 있었다.

치매 앓고 있는 큰아버지를 돌봐 드리려고 요양사 자격증을 따서 내려왔다고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순간 그녀의 참담했던 어릴 적 정경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자신에게 그토록 모질게 한 큰아버지가 아닌가. 혹시 너무 어렸을 때 겪은 일이라서 기억을 못 하나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덩그러니 두 노인만 남아서 투병(鬪病)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갈등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러나 버려진 삼남매를 거둬주신 분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 여겨져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과연 나라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화해를 한 그녀를 보며 지난날 나를 스쳐 간 크고 작은 일들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