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

[태평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의 즐거운 반란

도깨비-1 2011. 5. 17. 17:15


[태평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의 즐거운 반란


 문갑식 선임기자/ 2011. 05. 13 조선일보

 

 

   지난 4일 수업이 다 끝난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 9반에서의 일이다. 선생님이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아이들을 불러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 나눠줬다. 초콜릿과 사탕 몇 개에 비닐편지가 들어있는 '선생님 표'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그 편지 중 하나를 소개해본다. '웃음 바이러스를 퍼뜨려주는 애교쟁이, 어른스러운듯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예쁜 ○○이에게~. 장래 희망을 빨리 정한 만큼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이를 기대해도 되겠지? 사랑해♥♥♥'
   네 번 접도록 된 비닐편지는 약(藥)봉투처럼 생겼다. 가로 4㎝, 세로 20㎝에 앞엔 우표형 스티커 한 장, 뒤엔 심장 모양의 하트 스티커가 석 장 붙어 있다. 그 안에 삼색(三色) 펜으로 깨알처럼 적은 글을 세어 보니 원고지 2매 분량이었다. 선생님은 자기 반 학생 29명 전원에게, 다 다른 사연을 2매씩 써 200자 원고지 60매를 채웠다. 거기에 자비(自費)로 간식을 사고 손수 포장까지 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매주 만드는 학급신문을 보고 이런 어린이날 선물은 약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급신문의 제호(題號)는 '나뭇잎 편지'였다. 글쓴이는 '가온'과 '애플샘'이다. 가온은 순 우리말로 '가운데 중심'이란 뜻이며 학생들 전체를 가리키고, 애플샘은 선생님 자신의 별명 같았다. 4월 첫주치를 보니 1면에 일별(日別) 수업내용과 공지사항이 나왔다. 2면은 학생이 고른 '빛나는 문장', 3면은 '함께 읽을 독서감상문', 4면은 '내 인생의 목적지', 5~9면은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라는 주제로 쓴 아이들의 글이었다. 1년만 모으면 그냥 훌륭한 문집(文集)과 앨범이 될 내용이었다.
   모든 관심을 자신들에게 쏟는 선생님의 소중함은 아이들이 제일 잘 안다. 그래서인지 졸업생도 끊임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정작 학부모들은 당황스러워한다. '강남' '초등학교' '교사'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을 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난해 누군가 선생님에게 생크림 케이크를 보냈다. 다음날 손대지 않은 케이크가 줄줄 녹아 아이 편에 되돌아왔다. 학급 임원 어머니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얼마 전 음료수를 몇 병 들고 갔다. 선생님은 '아리수'를 마시며 병엔 손도 대지 않았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선생님은 꽃도, 편지도 다 사양한다는 뜻을 몇 번이나 전했다. 분명 보고 싶은 모습인데도 막상 맞닥뜨리면 고민되는 상황, 그래서 상식(常識)을 반란하는 이 선생님이 학부모에겐 불편한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는 보통 12명의 담임선생님과 함께 순백(純白)의 시절을 보낸다.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선생님에 유치원과 대학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 가운데 '진짜 선생님'을 단 한 분이라도 만난다면 우리의 삶이 맑아진다.
   이 선생님 이야기를 취재하던 중 전직 체육단체장을 만났다. 칠순을 넘긴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을 기억해냈다. "집안이 기울어 매일 굶었어요. 그걸 안 선생님이 본인 도시락을 주셨어요. 그 밥을 눈물에 말아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선생님 덕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다"는 말에서 선생님이란 단어의 무게를 느꼈다. 제자를 끝까지 지켜보는 그림자가 바로 스승인 것이다.
   스승의 권위가 길에서 밟히는 카네이션처럼 된 시대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 피듯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이런 젊은 선생님들이 계속 나오기에 세상은 살맛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