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言論 입장서 되돌아 본 세월호

도깨비-1 2014. 5. 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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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論 입장서 되돌아 본 세월호

 

입력 : 2014.05.07 05:33 /조선일보

 

선체 전체 물에 잠긴 6일 후까지 '생존자 있을 것' 가족 속인 인터뷰
잠수요원들 목숨 건 구조 활동에 '못 구하는 게 아니라 안 구하는 것'
선장·해경·정부 비판 필요하지만 무책임 보도 역시 책임 느껴야

김창균 부국장 겸 사회부장
김창균 부국장 겸 사회부장
세월호 참사 이레째인 4월 22일 안산 장례식장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단원고 실종자 A군의 시신(屍身)이 안치된 빈소에 같은 반 B군의 부모가 "우리 자식"이라고 찾아온 것이다. A군 부모가 A군과 옷을 바꿔 입은 B군을 A군으로 착각했고, DNA 검사 결과 B군으로 확인됐다. 한편 이 무렵 목포 병원에선 수많은 실종자 부모들이 "내 자식이 분명한데 왜 DNA 검사를 기다려야 하느냐"며 시신을 안 내주는 공무원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안산은 DNA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시신을 인도해서 생긴 문제였고, 목포는 반대로 DNA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신을 인도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어떤 언론은 '시신이 바뀌었다'고 비판했고, 어떤 언론은 '시신을 내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양쪽 경우를 싸잡아서 '부모를 두 번 울린다'고 비판한 언론도 있었다.

사건 초기 며칠 동안 탑승자·실종자 수가 오락가락하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은 '숫자 하나 제대로 못 헤아린다'고 정부를 꼬집었다. 사건 첫날 침몰한 배 안에 단원고 학생 250명이 갇힌 상황에서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고 발표한 것과 실종자 수를 107명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290명이라고 정정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잘못이다. 그러나 그 이후 탑승자 수가 470명 내외에서 몇 차례 조정된 것까지 무능한 행정 탓을 할 수 있을까.

여객선 승객은 보통 '○○○외 몇 명'이라는 식으로 신고한다. 여행객이 자기 신원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데 강제할 방법은 없다. 또 이번 구조 작업은 해경뿐 아니라 어업지도선과 민간 어선까지 달려들었고, 이들이 각자 구조한 인원은 여러 병원에 나뉘어 수용됐다. 수백명의 운명이 순식간에 갈리는 재난 현장에서 탑승자, 구조자, 실종자 수를 짧은 시간에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3월 23일 미 워싱턴주에서 발생한 산사태 때 수색 당국은 첫날 "사망 3명, 부상 8명"이라고 확인된 숫자만 발표했다. 사망자 수는 사흘 만에 24명으로 늘어났고, 한 달 만인 4월 22일 41명으로 최종 집계됐다. 우리 언론은 대규모 인명 사고 때 생존·사망·실종 숫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이후 숫자가 바뀌면 '고무줄 집계'라고 공격한다. 이제 인명 피해 집계에 관한 한 신속성을 포기하고 정확성만을 요구하는 선진국 모델을 따를 때가 됐다.

4년 전 천안함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에어 포켓'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등장했다. 에어 포켓은 침몰한 선박 내부에 공기가 남아 있는 공간, 그래서 승객들이 마지막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사고 당시 동영상을 보면 90도쯤 기울었던 선박이 2~3분 사이 완전히 뒤집히며 배 밑바닥이 하늘을 향하며 침몰했다. 3~4층에 몰려 있던 승객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배 밑바닥 에어 포켓으로 이동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세월호는 사고 이틀 만인 4월 18일 오후 1시 선체가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기면서 실낱 같은 에어 포켓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그로부터 6일 후인 4월 24일 다이빙벨 이종인 대표는 방송 인터뷰에서 "생존자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답했다. 그것은 실종자 가족들을 기만한 '희망 고문'이었다.

천안함 폭침 때 사고 8일 만에 첫 번째 시신을, 12일 만에 두 번째 시신을 찾았다. 희생자 46명 중에서 잠수 요원들이 바닷속에서 시신을 건진 것은 그 두 명이 전부였다. 천안함보다 구조 환경이 더 나쁘다는 세월호 사고 해역에서 하루 평균 10명 이상씩 시신이 수습됐다. 사고 21일째인 6일 현재 시신이 확인된 사망자 수가 268명이다. 잠수 요원들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사투(死鬪)의 결과였다. 그러나 사건 초기엔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 구하는 것"이라며 구조 요원들을 비난하는 얼치기 전문가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인터뷰가 생방송을 탔다.

세월호 참사는 "선실에 남아 있으라"는 방송으로 승객들의 발목을 묶고 자기들끼리 탈출한 선장·선원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뒤 40여분 동안 배 밖으로 나온 사람들만 구조한 해경 역시 수많은 인원을 구조할 기회를 놓쳤다는 책임을 면키 어렵다. 정부는 뚜렷한 리더십 없이 제각각 놀면서 실종자 가족들의 분노를 키웠다. 그런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지적하는 것이 언론의 책임이다. 그러나 언론 역시 책임질 수 없는 정보로 실종자 가족과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필자 역시 세월호 보도를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회초리를 맞을 각오가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