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매리 (鄭人買履)
입력 : 2013.11.20 05:51 /조선일보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어른이 먼저 마셔야 젊은이가 따라서 마시는 것은 술자리의 예의다. 노나라 젊은이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셨다. 어른이 술을 들이켜다 말고 속이 불편했는지 토했다. 예의 바른 젊은이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따라 토했다. 송나라 젊은이도 배우기를 즐거워했다. 어른들이 술잔을 남김없이 비우는 것을 보고는 제 주량도 가늠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가 쭉 뻗어 버렸다. 배우려는 열의는 가상했지만 배울 것을 못 배웠다.
'서경(書經)'에서 "묶고 또 맨다(紳之束之)"라 한 대목을 읽고, 송나라 사람이 허리띠를 묶은 위에 하나를 덧대어 맸다. "여보 그게 웬 꼴이오?" "서경에 묶고 또 매라 한 말도 모른단 말이오? 나야 그대로 따를밖에."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열심히 한다는 게 일을 외려 그르친다.
정나라 사람이 신을 사러 장에 갔다. 그는 먼저 발 치수를 쟀다. 막상 장에 갈 때는 치수 적어둔 종이를 깜빡 잊고 집에 둔 채 나왔다. 그가 신발 장수에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발 치수 적어둔 종이를 깜빡 두고 왔네. 내 얼른 가서 가져옴세." 그가 바삐 집으로 돌아가 종이를 가지고 시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발 장수는 이미 가게 문을 닫은 뒤였다. 곁에서 보던 이가 물었다. "어째서 직접 신어보질 않았소?" "자로 잰 치수는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인매리(鄭人買履), 즉 정나라 사람이 신발 사는 이야기다.
'한비자(韓非子)'의 외저설(外儲說)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곧이곧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제대로 똑바로 하는 것이 긴요하다. 직접 신어 볼 생각은 없고 맨날 치수 적은 종이만 찾다 보면 백날 가도 신은 못 산다. 백성을 위한다는 선량들이 나랏일 하는 꼴이 맨날 이 모양이다. 맨발로 겨울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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