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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오이디푸스, 아자세, 홍길동

도깨비-1 2013. 8. 12. 20:23

[김정운의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오이디푸스, 아자세, 홍길동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입력 : 2013.08.09 03:12 /조선일보  

殺父 신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없는 日, 천황제 폐기 불가능
오히려 '원폭 희생자'라며 징징대는 응석이 일본인 집단심리 형성
한국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콤플렉스…
친부살해도, 형제애도 없어 부모 헷갈리는 막장 드라마 유행하나?

 

 

현재 나는 교토 외곽의 한 전문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있다. 사실은 노인들을 위한 '성인만화' 작가를 꿈꾸고 들어갔다. 고령화 사회의 엄청난 블루오션인 까닭이다. 그러나 남다른 에로틱한 상상력을 표현하기에 내 일어 실력이 형편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매일 오전 일본어 수업을 받는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학원 이름이 '녹두학원'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존경한다는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 선생이 운영하는 작은 학원이다. 학생 중에는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는 일본 아주머니들이 많다. 한류의 원조는 욘사마가 아니다. 윤동주 시인이다. 무라야마 선생은 '안성기 평전'을 써서 우리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국민 배우 안성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엄청나게 야한 것 같다).

무라야마 선생은 수업 시작할 때마다 신문을 펴놓고 아베 총리의 일본을 성토한다. 그는 젊은 시절, 천황제를 이용해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극우 세력이 판치는 일본은 곧 망할 거라 생각해서 연금도 안 들었다. 그 때문에 요즘 아침마다 부인에게 혼난다. 그는 천황제에 어떠한 문제 제기도 없는 일본의 현실에 아주 깊은 한숨을 쉰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일본에서 천황제의 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한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오이디푸스의 투쟁은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 살해로 완성된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변화는 없다. 아들을 위한 세계도 없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은 형제들끼리의 투쟁을 막기 위해 아버지를 상징하는 토템 동물을 만들고 숭배한다. 아버지의 여자들을 건들면 안 되는 터부도 함께 시작된다. 종교와 사회제도의 오이디푸스적 출발이다.

역사학자 린 헌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 이후 나타난, 뜬금없는 구호 '형제애'는 절대군주제를 대체하는 오이디푸스적 해결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전혀 다른 언어와 인종이 '유럽연합(EU)'이라는 이름하에 모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형제애'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가능하다. 물론 이런 평화적 통합에는 독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의 전후 세대는 나치 시대의 부모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주말마다 TV에서 틀어대는 할리우드식 전쟁 영화에서 그들의 부모들은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살해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살해하는 연합군 편이다. 끊임없는 상징적 친부 살해다. 이 고통스러운 독일의 오이디푸스적 자기부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유럽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를 부정한다. 일본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감히 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일본의 1세대 정신분석학자 고사와 헤이사쿠(古澤平作)는 대안으로 '아자세 콤플렉스'를 주장한다. 인도 불전에 나오는 '아자세'라는 인물은 어머니가 자신의 출생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에 원한을 품고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으로 참회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원망과 사랑이라는 양가감정이 일본인의 심층 심리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거다.


	프로이드도 헷갈리는 한국식 막장드라마.
/김정운 그림
고사와 헤이사쿠의 제자 도이 다케오(土居健郞)는 '아자세 콤플렉스'를 더 발전시켜, 일본인에게는 '아마에(甘え)'라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고 주장한다. 엄마 치마폭의 응석 부리기나 어리광과 같은 정서가 일본인들의 독특한 집단의식의 심리학적 근거라는 거다. 일본인 정신분석학자들의 주장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일본은 영원히 아버지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식민지 지배나 태평양전쟁 당시의 만행에 대해 일본이 보이는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된다. 이 이야기를 끌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천황제에 대한 부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폭 희생자다!' '식민지 시대는 배상으로 끝났다!'와 같은 '응석 부리기'만 죽어라 해대는 거다. 일본도 이제 좀 군대를 갖고 강해져야 한다고, '아마에'적 정서로 '징징대는' 일본과 동아시아의 밝은 미래를 도모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졸졸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결론이다.

독일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일본이 '아자세 콤플렉스'라면, 우리는 어떨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콤플렉스'다. 도무지 부정할 만한 아버지조차 없다는 이야기다. 허약한 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했다. 독립도 남의 도움으로 겨우 가능했다. 그런데 곧바로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며 싸웠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서로 죽일 듯 째려보고 있다. 도무지 헷갈리는 것은, 한민족이라는데 도대체 서로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인데, 저쪽은 죽으라고 '어버이 수령님'만 외쳐댄다. 아주 환장한다.

상징적 친부 살해는 물론, '형제애'조차 꿈꿀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TV에 부모가 헷갈리는 '막장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 거다. 막장 드라마는 분단이 남긴 정신분석학적 상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전 세계에 유일한 이 어처구니없는 분단 현실이 어떠한 집단 심리학적 상처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심리학자로서 너무 안이한 태도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많이 건너뛴 것 같다.

 흠… 그래서 내 칼럼 이름이 '아니면 말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