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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과학이지만 "의료는 정치"

도깨비-1 2013. 8. 24. 21:13

의학은 과학이지만 "의료는 정치"

허윤희 기자  /입력 : 2013.08.24 03:10  조선일보

외국에선 인정받는 건보제도인데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나는지…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가 조목 설명
의사·환자·정부·산업 갈등 읽어야 "완벽한 공짜 의료는 실현 불가능"


	'개념의료'
개념의료|박재영 지음|청년의사|416쪽|1만8000원

# 장면 1.

2009년 7월 15일 미국 워싱턴 DC 상원 방문자센터. 전재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전국민건강보험 체계를 구축한 한국의 경험'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가 후원했고, 미국의 건강보험 전문가와 정책 담당자들이 참석했다. 전 장관은 한국의 건강보험제도 운영 노하우를 미국에 제공하겠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 개혁이 성공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고 '훈수'를 뒀다.

# 장면 2.

강원도 소도시에 사는 만삭의 임신부가 양수가 터져 인근 산부인과를 찾았다. 양막 조기 파열로 응급 분만이 필요한 상태. 하지만 분만 도중 갑자기 호흡이 멈췄다. 의사는 급히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2차 병원으로 후송돼 제왕절개수술을 받았지만 자궁 파열이 진행돼 과다 출혈이 발생했다. 이 여성은 다시 앰뷸런스를 타고 대도시 병원으로 이동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가 살던 지역에 제대로 된 분만 병원만 있었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전문의들은 말했다.

두 얼굴의 한국 의료

한국 의료는 두 얼굴을 가졌다. 아주 매력적인 얼굴과 대단히 볼품없는 얼굴, 둘 다 한국 의료의 민얼굴이다. 보건 의료에서 한국은 수십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했다. 2009년 태어난 한국인의 기대 여명(연령별·성별 사망률이 현재와 같다고 가정할 때)은 80.3세로 OECD 평균 79.5세보다 높다. 1960년 대비 무려 27.9년이 늘었다. OECD 평균 11.2년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의료비 지출이 매우 적다는 것이 한국 의료의 최대 강점.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는 OECD 평균 3233달러지만 한국은 1879달러다. 평균 수명은 긴데 의료비 지출은 적으니 단연 효율성이 돋보인다. 개발도상국은 물론 미국 같은 선진국들까지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

하지만 한국 의료는 약점도 수두룩하다. 우선 의료비 중 환자가 자기 돈을 내야 하는 비율(본인 부담률)이 높다. 총 의료 비용의 42%를 환자나 가족이 알아서 조달해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전 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구조적 문제다. 건강보험이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중증 질환보다 경증 질환에 대한 보장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불친절한 의사 때문에, 비싼 병원비 때문에 환자들은 화가 난다.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말도 나온다. 내 월급에서 빠져나간 건강보험료가 얼만데 혜택은 왜 쥐꼬리만 한지, 어쩌다 병원에 가면 건강보험 예외 항목이 너무 많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가 부제. 의사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대한민국 의료계의 현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의학은 과학이지만 의료는 문화"라는 것. 전문가 집단과 관련 산업, 환자와 정부 간 이해 갈등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파고들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이 의료 분쟁이다.

의료는 결국 정치

의료가 '정치'에 휘둘리는 현실이 의료 개혁을 더 어렵게 만든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겠다"고 외치지만 이를 위해 국민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지난 4월 17일 경상남도의회 앞에서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요구하는 보건의료노조원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지난 4월 17일 경상남도의회 앞에서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요구하는 보건의료노조원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진주의료원 사태는‘의료는 정치’라는 현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남강호 기자
1999년 의약 분업 관련 분쟁이 '의료대란'으로 치달은 것도 정부의 거짓말 때문. 김대중 정부는 의사와 약사들의 수입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해 보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차흥봉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의 추가 부담은 없다"고 수차례 단언했지만 2000년 6월 기자회견에서는 "1조5000억원이 더 들 것"이라고 말을 바꾼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4대 중증 질환 100% 보장'을, 문재인 후보는 '본인 부담 100만원 상한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둘 다 '환상적' 공약이다. 4대 중증 질환(암, 뇌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 희귀 난치성 질환)에 걸릴 경우 나라에서 치료비를 100% 보장한다니, 아무리 많은 돈이 드는 질병에 걸려도 1년에 100만원만 부담하면 나머지는 국가가 다 알아서 해준다니 얼마나 든든한가.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환상'일 뿐.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돼서도 안 되는 정책"이라는 얘기다.

완벽한 의료는 없다

포괄수가제, 의료 민영화 등 이슈별 쟁점에 대해서도 풀어준다. '특진비'라 불리는 선택진료비 문제를 보자. 종합병원에서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의사가 진료를 할 경우 추가 비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환자가 전액 부담한다. 문제는 종합병원에는 다 '특진 의사'만 있다는 것이다. 이러니 환자는 '진료비만 올리려는 꼼수'라는 생각이 든다. 시민단체들은 아예 선택진료비를 없애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의 진단은 이렇다. "없애면 우선 환자 부담이 줄어들 것 같지만, 병원은 적자를 메우려고 환자들에게 다른 비용을 씌울 궁리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시키면 다른 부작용이 생긴다. 건강보험 혜택이 주어져야 할 다른 어딘가에 쓰일 돈이 없어진다는 뜻. 대형 병원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리고, 동네 의원은 더 어려워진다. 결국 선택진료비를 유지하면서 보완하는 게 최선이다."

저자는 '완벽한 의료는 없으며, 자원은 한정돼 있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먼저 인정하자고 말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의료 현실을 이렇게 선명하게 그려낸 책이 예전에 있었던가'라고 추천사를 썼다.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책들이 쏟아지는 요즘, 이슈를 판단하는 눈을 맑게 해줄 반가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