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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의 태평로] 동행자 K씨의 人權

도깨비-1 2013. 4. 4. 14:47

[선우정의 태평로] 동행자 K씨의 人權

입력 : 2013.04.03 23:03

 조선일보/ 2013년 4월 4일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에 관한 기사를 실은 것은 9년 전이다. "추락사(死)가 아닌 듯하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의견을 상세하게 다룬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선배로부터 "기사의 의미를 아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추락사가 아니라면 타살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유일한 동행자가 살해했거나 또는 방조했다는 것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썼느냐'는 것이다. 선생의 마지막 동행자 K씨다.

사흘 후 의문사위원회의 결론을 다시 보도했다. 증거를 못 찾아 '진상 규명 불능' 판단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선배의 조언대로 K씨의 인터뷰 기사를 별도로 다뤘다. 그는 선생이 죽음을 맞은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난 절벽에 붙어 있는 소나무를 잡고 뛰어내렸는데 뒤에서 '휙'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뒤쪽에 계셔야 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고, '양심고백'을 요구했다. 선생이 숨진 그날, K씨의 인생은 지독한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그는 "'선생님이 내 발목을 잡고 돌아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장준하 선생은 거대한 인물이다. 해방 후 수많은 지식인이 선생의 곧은 길을 걸어가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지식인들은 그를 존경한다. 존경이 깊을수록 장 선생의 허망한 최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 선생의 죽음은 발생 직후를 포함해 1988년 노태우 정부, 1993년 민주당, 2002년 1기 의문사위원회, 2004년 2기 의문사위원회에 의해 5차례에 걸쳐 조사, 또 조사됐다. 국가기관이 단일사건을 이처럼 여러 차례 조사한 것은 전례가 많지 않다. K씨는 그때마다 죄인처럼 불려 다녔다.

필부의 죽음이라도 진상을 밝혀 신원(伸寃)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진상을 밝힌다는 명분 뒤에서 인격을 무시당하는 K씨의 처지는 정말로 참담하다. 그에게 '중앙정보부 정보원'이란 낙인을 찍은 1기 의문사위원회, 이런 낙인이 허구임을 스스로 증명하고도 '암살'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 2기 위원회의 행적은 인격에 대한 장난질에 가깝다. 지금 인터넷에서 K씨의 실명을 찾는 것은 음주단속에 걸린 탤런트의 실명을 찾는 일보다 쉽다. 실명 밑에 걸린 잡다한 글 속에선 날마다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의 잔인한 민낯을 확인할 수 있다. K씨가 78세 시골 노인이 아니라 자기 권리에 민감한 투쟁적 젊은이였다면, 그들은 감히 이렇게 못 할 것이다.

정황이 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K씨를 암살범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닮았다. 정황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 이들이다. 그들은 국가기관이 선생의 죽음을 열 번, 스무 번 재조사해도 K씨가 "내가 암살범"이라고 말할 때까지, 아니 "내 아버지가 암살의 배후"라는 누군가의 말이 나올 때까지 음모론과 인격 살인의 비수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선생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고통을 인내할 수밖에 없었던 유족의 눈물에 공감한다. 아버지의 유골에서 그토록 커다란 상처를 목격했다면, 누구나 거칠게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 모습까지 공개한 것이 최선이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주변인이 일으키는 소음 속에서 끝없이 상처받는 한 인간의 초라한 권리가 마음에 걸린다. 장준하 선생은 좌우 진영을 뛰어넘는 곳에서 홀로 길을 밝히는 북극성 같은 존재다. 선생의 빛나는 위상을 다듬고 유지하는 것도 후대(後代)가 떠안은 과제이자 의무일 것이다.